[책과 작가] 소설가 편혜영 첫 장편 <재와 빨강>출간… 몰락과 생존 이미지 제목에 담아

'편혜영의 작품들은 명확히 대비되는 두 세계로 구축된다. 한쪽엔 빛, 문명, 인간의 세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어둠, 파국, 짐승의 세계가 있다. 이 작가가 특히 공들인 것은 후자인 세계를 지극히 명료하면서도 인상적인 방식으로 구축해내는 것이다. 일종의 미장센 세팅이다.'

편혜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에 붙인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이다. 편혜영 작가의 소설에는 흔히 '그로테스크' 같은 수식어가 붙는데, 이 수사는 앞서 말한 '미장센 세팅'에서 비롯된다.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등 일련의 단편은 현실의 범주들이 어떤 원초적인 미혹에 먹혀버리는 광경을 기괴한 방식으로 포착한다.

이를 테면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은 <사육장 쪽으로>는 전원주택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 기대했으나 종국엔 파국으로 치닫는 남자의 이야기.

소설 속 사육장은 아들을 문 개들이 사육되는 곳이자 아들을 치료하는 병원이 있는 근처이며, 그럼에도 그곳이 어디인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정체 모를 미지의 공간이다. 이 공간이 그려낸 세계의 초상화는 어디에도 빈틈이 없다.

당시 본심 심사를 맡았던 김윤식 교수의 말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엽기적 소설을 썼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야. 계산적이고 치밀하고 정확해. 자기 몸 하나가 있고 그 반(半)만 갖고 소설을 쓰는 것 같아. 그 반으로 자기를 넘어서려는 거야."

욕망이 치욕이 되는 아이러니

소설 속 화자와 작가는 별개의 인물이지만, 때로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개인사를 떠올린다. 때문에 이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소설을 읽으며 작가에 대한 개인적 관심사가 생길 터다. 2000년 신춘문예로 등단해 올해로 11년 차를 맞은 소설가. 두 권의 단편집을 냈고, 얼마 전 첫 장편을 발표했다.

지난해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전업 작가로 들어섰다. 맨 처음 받은 소설책은 자신에게 꼭 사인을 해 선물한단다. 음울한 소설과 달리 말투는 발랄하고 대답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자기 몸의 반(半)만 갖고 소설을 쓰는 것 같다'는 김윤식 교수의 말을 돌이켜보면, 인터뷰 자리에 나온 이 작가는 그 나머지의 절반을 선보이는 셈이다.

이 2000년 생(生) 작가가 생각하는 '문학하기'란 무엇인가. 작가는 몇 해 전 어느 문예지에 이렇게 썼다.

'말하자면 어떤 그리움이나 상실감이 없는 채로, 부정해야 할 대상도 없고 증언하고 싶은 시절도 없이, 고백해야 할 내면이나 문학적 책임의식도 없는 20세기 막바지 세대가 21세기에 문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쩐지 재미없는 농담 같다.' (문예지 <문학 판> 2006년 겨울호, <교본의 시간>)

솔직하면서도 거침없는 답변이다. 그녀의 음울한 작품이 그만큼이나 우울한 우리 현실의 또 다른 축소판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평단의 해설과는 별개로, 그녀는 소설을 '어떤 그리움이나 상실감이 없는 채로' 쓰고 있다.

"선배들은 문학이나 소설에 대해 굉장히 경건하게 생각하시죠.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저는 문학이 좋긴 하지만 내 삶에서 전부가 아닌 세대인 것 같고, 그래서 글을 그렇게 썼던 것 같아요. 2000년대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이 '각개 전투'식이라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저에게 문학은 애당초 뭔가를 쟁취해야 하는 게 아닌 거예요."

'문학은 뭔가를 쟁취해야 하는 게 아닌 거'란 답변과는 별개로, 그녀의 소설은 역병이 창궐한 도시의 폐쇄된 아파트(아오이가든), 개들이 짖는 소리를 따라 헤매는 병원(사육장 쪽으로), 어두운 공원에 버려진 더러운 토끼(토끼의 묘) 등 세계의 이면을 우울한 렌즈로 담아낸다. 그리고 그 미학적 전략은 카프카의 그것에 비견되기도 한다.

"카프카를 좋아하긴 하지만, 제 소설이 카프카의 영향 아래 있다면 카프카가 깜짝 놀라지 않을까요? 저렇게 무서운 소설 쓰는 애가. 저는 욕망이 삶을 망치는 아이러니에 끌리는데, 그 얘기는 결국 자기가 꿈꾸는 욕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잖아요. 꿈꾸면 꿈꿀수록 몰락해가는 것 아닌가. 누군가 카프카를 떠올린다면, 욕망은 이룰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재와 피로 덮인 얼굴

작가의 첫 장편 <재와 빨강>은 두 권의 단편집, 그 연장선에 있다.

제약회사에서 약품개발원으로 근무하는 주인공은 파견근무를 발령받고 C국의 본사로 떠난다. 마침 C국은 감기와 유사한 전염병이 창궐하여 위생검열이 강화된다. 문득 본국의 집에 가둬놓고 온 개가 생각나 동창생 유진에게 개를 풀어놔 달라고 부탁한다.

다음날 유진에게서 난자당한 개와 칼에 찔려 죽은 전처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연락이 온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손바닥의 멍,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출국 전날 밤의 기억, 유진과의 술자리 등 혼란스러운 생각에 휩싸여 주인공은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고, 자신이 유력한 살해용의자로 지목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뜻밖의 소식에 당황하던 차에 누군가 숙소의 문을 두드리자 깜짝 놀란 주인공은 창 밖 쓰레기더미로 몸을 날린다.

이제 주인공은 부랑 생활을 한다. 시궁창에서 쥐와 음식을 다투고 그러다 보디백에 싸여 하수구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다. 지하생활을 하던 주인공은 쥐를 잡아달라는 민원으로 하수구에 내려왔던 방역팀장의 손에 붙잡혀 방역원으로 일하게 된다.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쥐 잡는 방역활동을 계속하던 주인공은 어느 집에서 쥐꼬리 숫자를 속이려 하고, 이 일로 자신을 위협한 주인여자를 죽이게 된다.

"대지진이 경고되는 나라에서는 아주 경미한 지진에도 사상자가 발생한대요. 건물이 붕괴될까봐 뛰어내린다는 거예요. 살려는 욕망이 오히려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거잖아요. 저는 열심히 해보려고 할수록 삶이 치욕이 되거나 수렁에 빠지는 그런 아이러니를 좋아해요. 그 얘기가 소설 전체의 시작이 된 거죠."

제목인 '재와 빨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이자 주인공의 양면(몰락과 생존)을 집약한 말이다. 작가는 "소설 속 폐허의 이미지인 잿빛과 살아남는 사람을 뜻하는 붉은 빛, 소설 속 묘사된 쓰레기 더미에서 재의 빨간 이미지에 대해 생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불운에 불운이 겹친' 주인공의 설정이 극단적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인공이 세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으니까 얼핏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계 자체를 폭력적으로 만들었다는 데 가해자이기도 하잖아요. 또 모든 선택은 자기가 한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보통사람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받으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첫 장편을 낸 작가는 <문학과 사회>에 두 번째 장편<서쪽 숲에 갔다>를 연재 중이다. 가을에는 세 번째 단편집이 나온다. 그 일련의 이야기 역시, 세계의 심연을 포착한 치밀한 관찰기일 게다.

"한편으로 틀 지워지는 거 있죠. 근데 제가 아니라고 항변해서 될 일도 아니고. 그로테스크하다는 평은 지금 이 시기에 쓰인 제 소설의 특성인 거지 영원히 틀 지워질 것 같지는 않아요. 불만은 없고 그렇다고 옹호하는 것도 아니에요. 첫 번째 단편집에서 두 번째 단편집이 변했듯, 또 장편이 변하듯 제 소설이 계속 변화를 보인다면 그런 얘기는 자연스럽게 바뀔 것 같아요."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