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크로스토프 바타이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망각이라는 이름의 저 폭력과 축복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 읽던 순간만은 선명하게 기억나는 책이 있다.

한밤이었고, 비가 오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창밖으로 비 듣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1999년 여름. 세기말의 공포나 실업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단지 실연의 상처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적의를 품고 있던 시절이었다.

비는 쉬 그치지 않았다. 책이 품은 침묵의 무게 때문에 나는 밤새 책을 읽었다. 허술한 분노는 수치로 바뀌었고, 비로소 내 슬픔이 너무 말랑하다는 것을 알았다. 잊혀지면서 잊는 것, 나는 침묵 속의 저 단단한 고독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크리스토프 바타이유의<다다를 수 없는 나라>(문학동네, 1997. 원제:ANNAM). 스물한 살 사내의 그 처녀작을 나는 지금도 가끔 꺼내 읽는다.

서른 중반이 되고 보니 부분부분 불편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일테면, 다분히 신비적 색채가 풍기는 우리말 제목부터,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그 환상에 일조하고 마는 작가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그렇다고 이 책의 매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읽어도 "침묵을 배경으로 가진 말"(막스 피카르트)의 깊이를 이 소설만큼 잘 보여주는 책은 드물기 때문이다.

'사건'을 따라가면, 이 소설에는 죽음만이 존재한다. 베트남으로 떠난 프랑스 선교사와 군인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인물들이 등장 후 곧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의 본격적인 사건 역시 베트남의 어린 황제 '칸'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채, 그리고 스스로를 잊은 채 살아"남은 마지막 두 사람의 선교사 역시 몇 년 뒤 죽는다. 이 젊은 작가의 문장 속에서 이들의 죽음은 비장하게 지연(遲延)되거나 끈적끈적한 습기를 머금지도 않는다.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그들이 견뎌야 하는 고독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베트남의 떠이 썬 운동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리면서 그들은 떠나온 곳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죽어간 곳에서조차 철저히 잊혀진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이제 '안남'이자 '프랑스'이고, 신의 세계이자 인간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일체의 수사를 허락하지 않는 존재의 고독 속에서 이제 그들 스스로도 그들을 구성했던 종교와 제도, 문명의 유산들을 하나하나 지워간다.

고독과 죽음으로 시작했으되 이 소설이 고독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망각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무한히 존재하는 자신"을 느끼고, 종교의 계율 대신 서로의 육체를, 관념적인 신의 사랑 대신 구체적인 인간의 사랑을 발견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타락이라 부르겠지만, 그들의 평화롭고 행복한 죽음은 그들이 비로소 '신'을 발견했음을 조용히 웅변한다.

그렇다면 이 망각은 폭력일까, 축복일까. 문장 사이사이 섬처럼 가로놓인 저 고독과 침묵을 견디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편의 글을 썼다. 발표한 적은 없지만, 그것이 십일 년 전 내가 쓴 최초의 문학평론이다.



이선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