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연호세 번째 시집 <천문>출간… 인간과 신·세계에 대한 질문

5000년 쯤 지나 지금의 한국어가 자취를 감추었을 때, 시집 한 권이 발견된다. 그리고 기호학자들은 이 시집을 발판으로 삼아 서기 2010년의 한국어를 추적해 나간다.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할 수 없을 것이다. 2010년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와 당신도 이 시집을 오롯이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그의 세 번째 시집을 들고 직장에 출근하는 시간. 버스에서 이런 상상을 해보았노라고 시인에게 말했다. 그가 웃음을 토해냈다.

"하하, 진짜 힘들겠네요."

조연호의 시를 한번쯤 접한 사람이라면 이 상상의 끝머리를 이해하리라. 그가 세 번째 시집 <천문(天文)>(창비 발행)을 냈다.

하늘의 文을 여는 방법

말하자면 그의 시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모호한 것이다. 그 모호함이란 거의 모든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이어서 그는 2000년대 한국시단의 가장 전위적인 시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가장'이 중요하다. 그는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를 말했던 '미래파'의 그 포위망마저도 벗어나 버린다.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은 10년만인 2004년 첫 시집 <죽음의 이르는 계절>를 냈다. 두 번째 시집 <저녁의 기원>에서 독자적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신간 <천문>은 시적 주제가 한결 철학적, 관념적인 주제로 옮겨왔다. 그 시집 끝에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이렇게 썼다.

'그의 문장들이 비롯되는 기저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의 세계가 아니라 조연호에 의해 창세기가 씌어진, 따라서 달리 말하자면 조연호 식 문법에 따라 새로운 통사적 관계를 맺는 어휘들에 의해 새겨지는 세계이다.' (해설 '음사音寫된 세계의 문채' 중에서)

그가 빚어낸 '문법의 세계'이란 무엇인가. 먼저 표제작을 읽는다.

'하늘의 문자에서는 분무 살충제를 뒤집어쓴 벌레처럼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고전주의자로서의 나는 별의 운동을 스스로 지켜볼 수 있기 때문에 별과 나 사이가 투명하지 않다고 여긴다/ 전달에 대한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성난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에서 평화로운 멜로디가 떠올랐다' ('천문' 부분)

시의 화자인 '나'는 인간과 신,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초월의 존재는 땅보다 하늘의 것이어서, 인간은 다가갈 수 없고 보이지만 해명될 수 없는 것을 동경했다. '나'는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대상, 별을 본다. 다가갈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은 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시인은 "시집이 여러 코드를 갖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와 우주의 관계, 별들과의 관계다. 그래서 제목을 '천문'으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법 공부 스텝 투. 무릇 법칙에는 기준이 있어야 할 터다.

'위작자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한다//(…)// 자신이 그린 하늘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마지막 화풍이었다/ 밤의 등근육이 흰 똥으로 이 인체를 더럽히고 있었다//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때때로 작은 편지들이 내게 돌을 굴려보내는 날에/노래가 천민의 둥지인 건/ 우주가 음사(音寫)된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고// 하나의 영혼이 둘 이상의 신체로 덮여가는 날에/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접혀 있는 발이 아코디언처럼 소리를 펼치고 있는 건/ 밤이 인간의 청동빛 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카디아의 광견' 부분)

나는 그림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림 속 밤하늘을 들여다본다. 갑자기 낯선 두려움이 살갗에 와닿는다. '자신이 그린 하늘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게 위작자의 마지막 화풍'임을 깨닫는 순간, 밤은 몸('밤의 등근육')이 된다. 밤이 몸이 되는 순간 나는 '우주가 음사된 우리의 세계' 안에 있다. 이렇듯 그의 시는 새로운 문법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시인은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자신만의 언어로 쏟아낸다.

'물결이 오고 있는 곳은 이야기의 끝 약 이백 페이지 남짓한 지점이었다 편지는 날아올라 그것을 본 내게 별이 더 이상 비약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우주가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하는 질문에 천문학자는 '그것은 그것의 내부에서 온다'고 대답했다' ('점성(占星)의 성속사(聖俗史)' 중에서)

물론 이것은 평론가 조강석의 눈을 빌어 독자의 한 사람이 읽은 것에 불과하다. 이 시집은 여러 해석의 여지를 품고 있다. 그 다양한 층위를 설명을 해달라는 부탁에 시인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겠다"고 말했다.

"시의 장점은 내 방식대로 읽어도 읽을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 코드가 섞여 있으니까 개인 읽으면서 독자적으로 읽어주기를 바라는 거죠. 그게 권리이기도 하고."

- 흔히 당신의 시를 소개할 때 '유려한 음악성'을 말한다. 아마 시인의 또 다른 약력 때문인 듯하다. (시인은 기타와 인도악기 싯타르 프로연주가이자 인터넷 음악 방송 '문장' PD다.) 음악성이 '음률'을 뜻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음악 작업을 하니까 내 시를 소개할 때 '시의 음악적 차용'이란 말을 많이 한다. 나는 그렇게 보는 걸 바라지 않는다. 맞는 말도 아니고. 음률, 리듬이라는 건 파동의 성질에서 비롯되는데, 사실 모든 게 전부 파동을 갖고 있다. 심지어 빛도 파동의 성질을 갖고 있다. 음률은 모든 사물이 갖고 있다는 거다. 음악성 이외에 다른 면도 봐주셨으면 한다."

- 미술이 공간을 장악하는 예술이라면 음악은 시간을 장악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은 형태가 없고, 오직 '음악을 듣는 순간'에만 음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당신의 시를 '유려한 음악성'이라고 소개한다면 그 음악성에는 동의할 수 있다. 당신의 시는 형태가 안 보인다. 읽고 나서 시집을 덮는 순간 언어가 사라진다. '읽는 그 순간'에만 음미할 수 있었다.

"시집을 긍정적으로 읽어주신 것 같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언어가 파편화되는, 읽고 나서 사라지는 그런 시를 쓰고 싶어 한다."

- 그래서 시에 대한 제대로 된 평론이나 해설이 거의 없지 않나. 언어로 설명하기 모호하니까.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기도 했고. '난해하다'는 말 들으면 어떤가?

"당연히 싫지. 그건 독자와 나의 관계를 금을 긋는 말이다. '소통 시도를 안하겠다'는 책임회피처럼 들릴 때도 있다. 내가 모호한 시를 쓰긴 하지만, '안 읽히기 위해서' 시를 쓰는 시인은 없다. 다만 다른 시각에서 개인적 작업을 할 뿐이다."

- 더 쉽게 쓰겠다, 이런 생각 들 때도 있지 않나? 현대 시를 '소통 단절의 시'라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런 시도를 안 하는 건 내가 유일한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이 가장 건강할 때는 가장 다양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 재미가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예술가들의 작업에 전혀 반감이 없다. 그리고 나는 나의 작업을 하는 거고."

- 흔히 당신의 시에 내러티브가 없다, 라고 말한다. 형태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에서는 철학적 사유가 느껴지는데.

"철학책 읽는 거 좋아한다. 특히 니체와 들뢰즈, 스피노자. 사실 고대부터 몇 천 년 동안 철학을 해왔는데 답이 안나오고 끊임없이 문제제기만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해답이라고 내놓는 것도 다 다르다. 웃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해봤다. 인간이 어떤 말로 규정지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철학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하고. 마찬가지로 나한테 세상은 불명확하고 혼돈의 존재, 무규정성의 존재다. 그래서 쓰는 사람마저도 혼란스럽고. 그러다보니 모호하고 애매하게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까 읽는 사람도 어렵게 느낄 수 있겠지."

- 두 번째 시집이 독자적 세계를 만드는 발판이었다면 이번 시집은 본격적으로 그 판을 열어둔 시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시집은 끝까지 갈 것 같은데. 그러니까 '우주(세계)와 자아에 관한 생각을 당신만의 문법으로 말하기' 말이다.

"시집을 내는 건 그 동안 써온 시를 총정리 하는 단계다. 정리 후에 시인이 경계할 것은 자기 복제다. 시적 방향성에 대해서 많이 고민한다. 말씀하신 것처럼 다음 시집에서 끝까지 써볼 생각인데, 더 파괴된 형태가 되지 않을까, 살짝 우려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상은 없지만 아마도 과거의 초현실주의 시들의 모양을 따르진 않을 거다. 초현실주의 시들의 특징은 우연성인데 나는 우연성을 믿지 않는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