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소설가 김인숙신간 <소현> 출간… 역사 소설을 쓰는 것은 그 인물을 알아가는 과정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동어반복'이다.

똑같은 기교를 가진 두 그림 중 하나가 위작으로 판명되는 순간, 그것은 작품에서 상품으로 전락한다. 이유는 '단지 그것이 동어반복이기 때문에'.

이 점에서 역사소설은 출발 지점부터 명확한 한계를 안고 나아간다. 이미 캐릭터와 서사는 뻔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잘못 쓰면 역사기술로 끝나버린다.

잘하면 본전, 못하면 본전도 찾지 못하는, 그렇다고 주어진 재료를 버리기엔 아까운 일종의 계륵(鷄肋)같은 것.

그럼에도 2000년대 한국문학 시장에서 역사소설이 일종의 붐을 이룬 것은 그 주어진 소재에서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칼의 노래> 속 이순신은 주어진 운명에서 고뇌하는 고독한 인간이란 점에서 저 광화문에 세워진 칼 찬 동상과 같은 인물이 아니다.

소설 '소현'
오랑캐에게 이마를 찌어 나라를 구한 인조와 그 이야기를 그린 <남한산성>은 참담한 굴욕의 장면이 미학적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00년대 역사소설은 그 닳고 닳은 과거의 사실에서 치욕의 순간을 꺼냈고, 그 치욕이 인간 삶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임을, 그것을 견뎌내는 자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김인숙 작가의 신작 <소현>역시 이 연장선에 있다. 이 책의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내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이 작은 나라의 비루함이 아니었다.'

이 소설은 치욕을 감내하는 시간, 그 시간을 견뎌낸 자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소현은 병자호란 이후 청의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를 일컫는다. 이 소현과 볼모로 그를 끌고 간 청의 왕 도르곤이 동갑내기다. 소설에서는 소현이 주인공, 도르곤이 조연과 단역 사이쯤 위치한다. 작가는 "도르곤도 영웅이었고 소현도 영웅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자의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있지만, 후자의 의견에는 설명이 있어야 할 터다.

작가는 "세월을 견뎌냈다는 것 자체가 영웅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월을 견뎌냈다'는 말에서 작가와 소현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녀는 대학 1학년 때인 1983년에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올해 작가의 필력은 27년이다.

또 하나의 영웅

이 소설은 패를 드러내고 시작한다. 패가 뜻하는 바를 아는 자가 판을 더 재미있게 구경하는 것이 역사소설이다. 병자호란의 패전국 조선은 세자인 소현을 청의 볼모로 보낸다. 그는 고독과 죽음의 불안 속에서 8년의 세월을 보낸다.

작가는 <소현>에서 청나라가 명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중국 대륙을 제패하던 시점, 소현이 불모 생활을 마치고 환국하던 1644년 전후의 과정만을 담고 있다. 청이 승리하면 환국할 수 있지만 조선의 굴욕은 끝나지 않는다는 모순된 운명이 소현 앞에 놓여있다. 그의 아버지 인조는 청이 아닌 명을 섬김으로써, 아니 그 섬김을 주장하면서 왕이 된 자다.

이 운명은 대중이 익히 알고 있는 바, 이것이 역사기술이 아니라 역사소설이 되려면 그 기운을 바꾸는 기술이 필요하다. 작가의 문장, 문체다. 소설 속 화자는 남자의 음성이다. 남자는 건조한 말투로 세월을 견디는 자의 고독을 말한다. 이전 김인숙 작가의 문체, 문장과 선이 다르다. 작가는 소현의 모순된 운명을 이렇게 썼다.

'세자는 임금의 아들이었다. 임금이 그들에 의해 임금이 되었으니, 세자도 그들에 의해 세자가 되었다. 세자가 그들의 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기원의 말처럼 세자의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세자가 그들의 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세자는 적의 땅에서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적의 땅에 머물며 낮과 밤마다 홀로 삭였던 고독이 조선의 땅에서 돌아와서는 고독을 넘어 슬픔이 되었다.' (161페이지)

이 모순된 상황과 치욕의 순간, 시간의 견딤이 세월을 뛰어넘어 울림을 주는 것은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360여 년 전, 작은 나라의 비루함을 담은 이야기가 현재성을 가진 이유다.

- <소현>의 모티프를 삼게 된 계기는?

"7,8년 전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졌다. 당시 역사 산문을 연재할 때여서 본격적으로 자료를 찾게 됐는데 그때 '역사 속 인물들을 소설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 중국에서 공부하며 도르곤이란 인물을 알게됐는데 굉장히 흥미 있는 인물이었다. 소현이 도르곤과 같은 나이임을 알게 됐고 두 사람의 삶이 밀착되면서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 오랜 기간 소설을 썼지만, 장편 역사소설을 처음이라고 들었다. 창작자로서 역사소설의 매력이 무엇인가?

"현대물을 쓸 때는 작가가 주인공을 다 알고 시작한다. 역사 속 인물은 '내가 이 사람을 모른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기록은 있지만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는 모르지 않는가. 역사소설을 쓰는 것은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가 그 인물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인물에 대해 다가가려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짝사랑 하듯이. 이 소설을 쓴 후 내 소설 속 인물에 대해서 갖는 진정성의 폭이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 작가가 보는 '소현'은 어떤 인물인가?

"소현은 단순히 청에 끌려가서 감옥에 갇힌 인물이 아니다. 그는 청에서 외교관으로 역할을 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본국에서도, 적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그 세월을 견뎌낸 것인데, 그 견뎌냈다는 것 자체가 나는 영웅적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소제목 중에 '또 하나의 영웅'이란 게 있다. 그 부분 쓸 때 내 마음도 좀 뭉클했다."

- 작가의 개인적인 부분이 녹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공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열정과 능력도 있지만 성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쓰는 5년 기간 동안 견뎌낸 거다.(웃음) 집필 중간에 물론 다른 일도 했지만 한번도 소현을 잊어본 적은 없다.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어떤 문장은 수백 번쯤 읽고 수백 번쯤 생각했을 것이다. 도르곤을 묘사하는 부분에도 썼다. '기다림을 아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라는 것을. 누군가 말하더라. 우리 삶도 영웅적으로 견디면서 사는 게 아니냐고. 우리 삶이 아무리 누추하더라도 산다는 것 자체가 참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작년 출간한 단편집 <안녕, 엘레나>와 <소현>의 문체가 너무 다르다. 이 작품은 남자의 음성으로 말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나를 행복하게 만든 것 중 하나가 문체의 실험이다. 역사소설은 100% 고증이 불가능하다. 소설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고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고. 작가가 다 알지 못해서 생기는 여백을 채워주는 게 문장이다. 문장이 우리가 볼 수 없는 시대의 여백을 채워준다고 생각했었고, 역사의 분위기를 살려준다고 믿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쓸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수백 번도 넘게 고쳤지만, 책 나오고 다시 읽으니 여전히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다."

- 앞으로 쓸 작품은?

"역사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쓰는 인물을 모른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현대물을 쓸 때도 아주 낯선 인물을 등장시켜서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외국이나 우주 같은 아주 낯선 상황에서 낯선 인물이 등장하는 장편을 구상 중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