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윤대녕여섯 번째 단편집 <대설주의보>… 존재의 시원 찾는 여행서 일상으로

1.소설마다 개성이 있게 마련이다.

화자의 구성진 입담이든, 거대 담론을 품은 묵직한 이야기의 힘이든, 형식의 변화이든 제 나름의 재미를 가진 작품이 그 값어치를 평가해 줄 시대를 만날 때, 그것은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니까, 80년대 거대담론이 사라진 자리에 '윤대녕의 그것은 90년대 중반이라는 전환기와 행복하게 만났다.'(문학평론가 신형철)

시대가 부여한 그 의미라는 것은 그러나, '일개의 작가'가 의도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의도한다고 해서 부여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윤대녕의 그것은 한 시대가 잃어버린 가치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에의 요구'가 만들어낸 이미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2. '존재의 시원(始原)'이란 그의 첫 소설집에 실린 해설은 줄곧 그의 문학세계를 수식해온 말이다. 그의 소설은 "그 먼 존재의 시원, 내가 원래 있어야만 하는 장소로 돌아가기"(첫 소설집 <은어낚시통신>)라는 것. 그리고 90년대 한국문학이 발견한 가치라는 것은 이 존재의 시원이라는 것.

3. 한 존재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닐 터이나, 또한 지천명의 작가가 신인시절과 같은 작품을 쓰진 않을 터다. 첫 소설집을 낸 후 그는 전업 작가로 생활했고 5권의 단편집과 7편의 장편, 2권의 산문집을 냈다. 지난 주 여섯 번째 단편집 <대설주의보>를 냈다.

'단편 <대설주의보>는 2009년 겨울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쓴 것이다. 내 생에서 모종의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는데, 그 심정을 담았다고 말하고 싶다.' (<대설주의보>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가 말하는 '변화'란 무엇인가. 그는 "삶의 리얼리티로 많이 이동해 갔다"라고 말했다.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로 태어난다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시간이 흐른다. 무릇 모든 이야기는 이러한 것이다. 소설의 맛은 이 만남과 헤어짐, 그 사이의 여백이 가늠한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방점이 찍힌 이야기를 우리는 문학이라 한다. <대설주의보>에 담긴 일곱 편의 단편이 그러하다.

이 일곱 편의 작품을 쓰는 동안 그는 전업작가에서 선생님(동덕여대 문예창작과)이 됐고, 그의 작품은 '삶의 리얼리티로 많이 이동해 갔다'. 그가 일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주목한 것은 관계 혹은 인연의 문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생을 지속한다. 대개의 인연은 불가해한 비극에 엇갈리지만 결국에는 운명처럼 다시 만나고 원래 돌아와야 할 그 자리를 찾아간다.

표제작 <대설주의보>는 백담사에 머물 때 눈 오는 풍경을 보고 '받아 적은 것'이다. 작가는 "어떤 사건보다 풍경에서 이야기가 올 때가 많다. 이미지, 분위기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백담사에서 해란을 만나려던 윤수는 폭설 때문에 백담사가 있는 산 아래서 발이 묶인다. 13년 전 만나 1년쯤 사귄 두 사람은 오해로 헤어지고 12년 만에 연락이 닿아 재회하기로 한 터였다.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도 없는데다 아예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은 해란이 최근 자살 기도를 했다는 소식이 윤수의 백담사행을 이끌지만 대설주의보가 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다.

원통 읍내에서 전전긍긍하던 윤수는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눈길을 뚫어 보기로 한다. 원통에서 백담사 입구까지 20분 거리를 1시간에 걸쳐 달려간 뒤 남은 6킬로미터 남짓 눈길을 힘겹게 헤쳐 간다. 마치 12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온 것처럼. 윤수의 앞에 한 대의 차가 선다. 그 안에 해란이 타고 있다.

<대설주의보>가 두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인연의 불가역성'을 은유적으로 암시한 작품이라면, <보리>는 그 인연의 고리를 자르려는 여자를 통해 다시 운명의 불가역성을 드러낸 작품이다.

수경은 매년 청명(淸明)에 시골 온천에 들러 옛 애인의 선배인 유부남과 만난다. 이렇게 만나온 것이 6년. 오랫동안 아이가 없던 남자가 늦둥이를 얻은 데다 유방암을 얻게 된 수경은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이별 통보를 받은 남자가 쏟아내는 격노의 말을 들으며 수경은 "스스로 구원 받았음을", "이제 혼자여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느낀다.

작품의 살을 발라내 뼈대만 소개했지만, 기실 그의 작품은 이야기보다 그 행간의 여백을 보아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작가는 "독자가 텍스트 안에 스며들면서, 행간에서 자기 사유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야기보다 비약적인 암시와 이미지를 통한 형상화, 순간과 순간 사이에 놓인 침묵과 단절에 능하다'는 평(문학평론가 김화영)은 그의 작품이 '존재의 시원을 찾는 여행'에서 '일상'으로 바뀌었더라도 여전히 유효하다.

- 신간 <대설주의보>를 내면서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장편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등 3권을 다듬어 개정판으로 내놨다. 다듬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초기작에서는 미문이랄까, 시적 메타포가 강한 문장을 쓰려고 애썼다. 지금의 여백이 사유하는 공간이라면 그때는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식의 화려하고 메타포 강한 시적 문장을 좋아했다."

- 작가의 말에 '모종의 변화'라고 했는데, 그 변화가 무엇인가? 바뀐 시점은?

"아마 몇 년 전 제주도에 살았던 시절에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때가 슬럼프였는데 제주도 현지인들과 어울리면서 몸이 많이 회복됐다. 문장에서도 변화가 오고. 감정노출이 적어지고 형용사나 부사를 쓰는 게 적어졌다. 그렇게 쓴 게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와 <제비를 기르다>이다. (문장이) 강하기 보다는 건조해진 것 같다. 작품은 삶의 리얼리티로 많이 이동해갔다. 생물학적으로 나이를 먹었고, 2년 전 학교에 부임하면서 남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패턴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작품 <여행, 여름>은 자전 소설 같은데

"거의 실화에 가깝다. 극작가 고 윤영선 씨와 인연인데, 그 분 돌아가시고 한동안 혜화동에 가지 못했다. 자꾸 생각이 나서. 토지문화관에 있을 때 극작가 배삼식 씨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감정을 마무리 지으려면 쓰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일주일 만에 썼고, 작년 문학사상 12월호에 발표했다. 주변 연극인들이 읽고 '작품 괜찮다'고 해서 안도감을 느꼈다."

일곱 편의 단편이 연속성을 갖고 있다. 해설을 쓴 신형철 씨는 한 편으로 읽힌다고도 했는데.

"작품을 썼을 시기에 일상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내 사유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각자 다르지만 주로 관계나 만남, 운명의 불가역성이 작품마다 내재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읽었을 수도 있겠다."

일곱 편의 단편에 작가의 주변인 같은, 그러니까 미술가나 극작가, 번역가 같은 직업이 많다.

"지난 책 <제비를 기르다>에서 의도적으로 그런 직업을 피했다. 그런데 '삶의 연속성이나 관계의 의미를 보여주는데 인물의 직업이 중요한가?'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쓸 작품은?

"단편집 2권을 연이어 낸 터라 장편을 쓸 생각이다. 이 책을 내고 나서는 다시 나로부터 탈각되어서 다른 인물이나 삶의 측면들, 외부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져야겠다, 생각하고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