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그곳에서 발견하는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

너무나도 유명한 이 첫 구절로 시작되는 소설은 바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있고 또한 수없이 많은 유명한 구절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설국의 이 첫 구절은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꼭 빠지지 않는 문학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일종의 통로인 그 터널은 사실 어떤 면에서는 경계이다. 도쿄 출신으로 룸펜인 시마무라는 이 터널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경계라고 말했거니와, 설국이 걸쳐져 있는 경계는 꽤 여러 가지다.

첫째, 장르의 경계. 설국은 소설이면서 동시에 한편의 서사시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시적인 아름다움과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스무 살 무렵, 설국을 처음 읽었을 때 일본어를 공부해서 원문으로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 후 일 년여 동안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신새벽에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 달려가곤 했었다.

소설 설국의 집필자인 다카한 료칸에 마련된 설국 전시장. 사진 안은 설국의 집필지 다카한과 설국의 실제 모델 여인
둘째, 현실과 현실 바깥의 경계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소설 바깥에서의 자신의 현실과 소설 안에서의 현실 바깥 세계를 끊임없이 넘나들고 있다. 소설 안에서의 현실 바깥세계라고 말했거니와, 설국은 시마무라가 니가타 지방의 한 온천으로 여행을 가고 그곳에서 만난 여인들과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셋째, 설국은 인간의 유한함과 자연의 무한함 사이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든다. 소설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묘사되고 있는데, 그 구절들을 읽고 있으면 나는 도리 없이 결국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자연 앞에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지극한 성찰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는 눈과 불의 경계라고 말할 수 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설국은 사방에 온통 눈이 가득한 니가타 지방이 배경이 되고 있다. 차갑고 깨끗하고 정적이며 슬프도록 아름다운 눈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풍경들은 처음도 마지막도, 시작도 끝도 없는 광막한 세계를 느끼게 해 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소설이 끝날 무렵이다. 거기에는 붉고 뜨겁고 세상을 다 태울 듯 환하며 인간의 불완전한 욕망과 끊임없는 정열을 상징하는 불이야기가 나온다. 불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활활 타오르면서 그때까지 소설을 장악하고 있는 눈의 세계를 녹여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이었다. … 고마코의 외침은 시마무라의 몸을 꿰뚫었다. 요코의 장딴지가 경련을 일으킴과 동시에 시마무라의 발끝까지 차가운 경련이 지나갔다. 뭔가 애절한 고통과 비애에 휩싸여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마지막으로 고마코와 요코 사이의 간격을 얘기할 수 있다. 설국은 도쿄 출신의 한량 시마무라와 게이샤인 고마코의 연애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요코라는 신비한 매력을 가진 여자가 등장하는데 요코에 대한 묘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인간의 유한함과 자연의 위대한 무한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시마무라는 전형적인 게이샤인 고마코를 사랑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요코를 떠올리지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시마무라가 요코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일은 없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을 정복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소설의 처음과 끝이 요코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은 곱씹어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말했듯, 설국은 한 남자와 게이샤와의 연애이야기로 줄거리를 따지고 들자면 사실 이렇다 할만한 게 없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스릴 넘치는 모험도,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갈등 국면도 들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건 바로 인간의 영혼이 아름다운 이유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조차 자연의 변화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이 책은 또한 그 문장이 읽은 이의 마음까지도 슬프도록 아름답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살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소설을 니가타현에 머물면서 집필했다. 그는 여행이 자신의 창작에서 중요한 창작의 요소라고 한다. <내 소설의 대부분은 여행지에서 씌여졌다. … 혼자만의 여행은 모든 점에서 내 창작의 집이다.> 그 때문인지 나 또한 설국을 읽을 때마다 간절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혼자서 여행을 떠나 자연과 오롯이 맞부딪쳤을 때 우리는 과연 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경계이자 통로가 되어 줄 여행에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봐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도시 생활에서 잊고 있었던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말이다.



김이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