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서 근작까지 363편 <최하림 시선집>에 담아[책과 작가] 故최하림 다시 읽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 작품은 작품의 호불호를 떠나 그 자체가 완벽한 텍스트로 다가온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김수영의 <풀>은 '한국어로 빚어낸 시란 이런 것'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방향타 같은 것이 아닌가.

최하림의 시도 누군가에게는 그러할 게다. "우리 시단을 주도해왔던 두 경향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순수와 참여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시의 완성이라는 목표에 연결시키려 했다"는 문학평론가 김치수의 말처럼, 그의 시는 시대의 시간과 함께 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전설이 된 그 이름들 옆에 시인의 이름도 나란히 놓일 터다. 이제는 말이다. 4월 22일, 시인 최하림 씨가 별세했다.

시인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의 근작 <최하림 시전집>(문학과지성사 펴냄)을 꺼낸다. 1961년 쓴 습작 시부터 2008년 쓴 근작 시까지 363편의 시는 그의 반세기 시력(詩歷)을 오롯이 담고 있다.

강 저쪽을 바라보다

'신간'을 받고 두 달이 지나 다시 꺼낸다. 지난해 봄 간암 4기를 선고받고 일 년간 묶은 책이다.

그가 강 이쪽에 있을 때 책을 받아 강 저쪽으로 떠난 뒤, 책장을 넘긴다. 그래서 이 두 달의 시간이 영겁 같다. 시인과 독자 사이, 레테의 강이 펼쳐진다.

'마침내 나는 쓰기를 그만두고 강으로 나갑니다. 나는 바위에 앉습니다. 비린 내음을 풍기며 강물이 철철철 흘러갑니다. 세상은 어느 만큼 살았으며, 세상 흐름을 얼마쯤 내다볼 줄 아는, 죽은 자들과 대면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나는 흐르는 물을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강물은(혹은 시간은) 사라져 버리겠지요. 그런데도 내 시들은 그런 시간을 잡으려고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6~7페이지, 시인의 말)

책의 맨 뒤에는 시인이 쓴 연보가 나와 있다.

'1939년 전남 신안군 안좌면 원산리에서 태어남, 1949년 33세를 일기로 부친 별세,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회색수기>가 입선. 목포의 한 다방에서 김현을 만남, 1963년 김현, 김승옥, 김치수와 함께 동인지 <산문시대>를 펴냄,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이 당선됨.'

책 표지는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트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을 삽화로 그린 것이다. 시인은 1962년 미술 잡지에서 자코메티의 조각품을 처음 접했다. 그가 문학평론가인 김현, 김치수, 소설가 김승옥과 '산문시대'를 결성한 해다. 이처럼 몇 줄의 연보는 그의 시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인의 아버지가 요절했다. 빈곤은 학업을 방해했고, 장남이었던 그는 신문 배달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나마 등록금을 제때 못내 학교를 가지 못하는 날에는 목포 해안가를 돌아다녔다.

말하자면 가난이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었던 셈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등록금 못내 학교에 못 가고 해안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목선(木船)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광경이 나온다. 이 배 저 배 타고 다니면 문학이 자연적으로 떠오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무들이 일전(日前)의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먼 들판을 횡단하며 온 우리들은 부재(不在)의 손을 버리고/ 쌓인 날들이 비애처럼 젖어드는 쓰디쓴/ 이해(理解)의 속 계단의 광선이 거울을 통과하며/ 시간을 부르며 바다의 각선(脚線) 아래로/ 빠져나가는 오늘도 외로운/ 발단(發端)인 우리' (23페이지, <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 중에서)

그는 이 시로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순수와 참여 극복하려는 의지

1964년 등단 이래 <우리들을 위하여>(1976), <작은 마을에서>(1982), <겨울 깊은 물소리>(1988),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1998),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1998), <풍경 뒤의 풍경>(2001),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2005) 등 7권의 시집을 냈다. <최하림 시전집>은 그의 등단 전 습작 시기의 시와 7권의 시집에 실린 시, 2005년 마지막 시집 출간 후 발표한 근작 시 등 9편으로 묶어 시간대별로 시를 정리했다.

그의 시는 발레리로부터 시작됐지만, 우리말은 우리 현실과 역사를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시인은 발레리의 역반응으로 시에 눈을 뜨게 된다. 역사가 중심이었던 초반의 시 세계에서 시인은 1980년 광주의 기억을 시의 중요한 질료로 삼았다.

'6·25와 1·4후퇴 때에는 아무도 대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어떤 늙은이가/ 어느 날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보려고/ 상체를 내밀었다가 깜짝 놀랐다./ 한말에도 왜놈 시절에도 해방 때도 떵떵거리며/ 차를 타고 왜놈 시절에도 해방 때도 떵떵거리며/ 차를 타고 다니던 놈 나라를 팔아먹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던 놈 그놈이 가고/ 있었다. 가롯 유다보다도 더러운 놈' (205페이지 <얼마나 세상이 변했는가> 중에서)

90년대 이후 그의 시는 자연과 내면의 소통을 추구하는 '풍경의 시학'을 보여준다는 평을 듣는다. "촌로들이 햇볕에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쓰기 시작한 것. 그의 시에서 역사마저도 시간의 한 경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오후가 되어 함석집에는 고요가 배양되면서//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마당을 빙빙 돌더니// 대문 밖으로 나갑니다 아주머니들도 골목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부릉부릉 빠져 나갑니다// 아주머니들은 백 년도 더 된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 달립니다 한 길에는 햇빛이 쨍쨍하고 녹음이 우거지고 개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길을 건너갑니다' (386페이지, <바람이 대 숲 길로 빠져나간 뒤> 중에서)

다시, 책의 맨 뒤쪽 연보를 펼친다.

'1966년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완수 등과 친교, 1973년 미술평론 <유종열의 한국 미술관> 발표, 1984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시 창작을 강의함, 1988년 <전남일보> 편집국으로 직장을 옮기고 광주로 내려가 혼자 생활함(…)2002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로 거처를 옮김…….'

그는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고, 한 때 출판사와 신문사에 적을 두었다. 지금은 문단의 중견이 된 수많은 문인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지난 2월 이 책 발간을 기념해 시인의 집 근처 미술관에서 조촐한 잔치가 열렸다. 그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장석남(서울예대 84학번), 박형준(85학번), 이병률, 이승희, 김충규, 이기인(86학번), 이원, 이진명(87학번) 씨 등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의 방명록으로 쓰인 송판에 남긴 박형준 시인의 글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선생님, 봄이 오면 함께 산책 가요.'

이처럼 이 한 권의 책에는 우리 시대의 시간과 시인이 녹아 있다. 그 시간을 무엇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2006년에 발표한 산문에서 시인은 "나는 시론을 가진 시인이 되고 싶지 않다. 시를 가까이 느끼고 그것을 따라가는 시인이고 싶다"고 썼다.

'사내는 현관문을 열고 눈 속으로 사라진 길을 찾아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간다 사내는 언덕을 넘고 들판을 건너간다 들판에는 몇 그루 침엽수들이 있다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크다 산 자와 죽은 자들도 그곳에는 함께 있다 바람도 햇빛도 함께 있다'(514페이지, <목조건물> 중에서)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