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안대회의 <선비답게 산다는 것>지금 나의 모습이 옛날 선비의 또 다른 모습임을 전해

어린시절, 새벽이면 멀리서 들려오는 무슨 소리에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곤 하였다. 한학자이신 아버지의 책 읽는 소리였다. 굳이 나를 흔들어 깨우지 않았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는 책 읽는 소리는 나에겐 언제나 자명종이었다.

내가 여섯 살 때였던 것 같다. 아침 햇살 따스한 어느 가을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무언가 잘못을 하신 모양이었다.

회초리는 아버지의 종아리에 피멍이 맺히도록 계속됐다. 바라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매서운 질책이 이어졌지만, 부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의 한 마디에 할아버지는 회초리를 내려놓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더 때려주십시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들이 있다. 전통시대의 지식인은 바로 '선비'란 말로 대변되는 사람들이다. 선비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은 우리와 전혀 동떨어진 세계의 사람들인가?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 좀 읽은 꼬장꼬장한 사람'이나 '고리타분한 원칙주이자'로 선비를 인식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나의 의식 속에는 나도 모르게 그런 선비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선비란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선비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선비란 우리의 전통에서 버려야할 무언가로 치부해버리는 게 솔직한 현실일 것이다.

안대희 성균관대 교수
그런데 그게 선비의 전부일까? <선비답게 산다는 것>(안대회, 푸른역사, 2007)은 우리에게 선비란 결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고, 결코 버려야 할 그 무엇도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선비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전형을 전통시대의 선비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죽음에 직면해 남의 시선을 빌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글, 자찬묘지명을 쓰는 선비의 모습은 읽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차분히 글을 쓰며 준비하는 것이다. 시시콜콜한 자신의 일상을 13년간이나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긴 유만주의 <흠영>은 기록을 대하는 지식인의 자세를 알려준다. 무언가에 미쳐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로 지금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선비들의 삶의 다양성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들의 삶의 모습이 바로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임을 인식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삶 속에서 찾았던 문제의식이 지금 나의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바로 옛날 선비의 또 다른 모습임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오늘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 삶의 다양성이 과연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인가?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박철상 고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