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수크령

한 해로 치면 끝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가을, 하루로 치면 해가 기울어 마지막 햇살을 비추는 석양 무렵 더욱 아름다운 식물이 있다. 스산하기도 서늘하기도 하지만 더욱 그윽하고 그래서 정신은 오히려 맑아지며 차분해지는 이 즈음, 계절과 시간에 꼭 적합한 풀, 수크령이다.

한강둔치나 천변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길, 혹은 모처럼 가을을 만나러 떠난 산행의 하산길, 시골마을 가장자리 정자에 잠시 몸을 쉬며 농주로 피로를 풀며 있을 즈음, 이 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석양을 받아 반짝반짝 생기가 돌아 누구나 한번쯤 인상 깊게 보았을 것 같은 풀이 바로 수크령이다.

수크령은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생김새로 치면 강아지풀과 비슷하지만 훨씬 키고 크고 꽃차례도 크고 색도 진하며 억세다 싶은 것이다. 키는 60cm정도에서 1m까지도 자란다. 강아지풀을 닮은 이삭은 쉽게 말하면 꽃잎이 없는 꽃들이 다닥다닥 원통형으로 달려있는 모습이고, 여름의 막바지쯤에서 피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볼 수 있다.

수크령이란 이름은 남자그령이란 뜻이다. 암꽃 수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암그령에 해당하는 그냥 '그령'이라는 식물이 있는데, 이 그령처럼 길가에 많지만 훨씬 억세고 느낌은 물론 이삭의 모양이 남성스러워 수그령에서 수크령이 되었다고 한다. 그령이란 그 유명한 결초보은의 유래를 가지고 있는 풀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위무자의 아들 위과가 전쟁에서 위태로워졌는데 한 노인이 밤새 풀들을 서로 잡아 매어놓았고 다음날 적군의 말들이 걸려 넘어져 승리를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풀을 매어 은혜를 갚는다는 뜻의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말이 생겼다. 그래서 그령은 그려매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수크령을 두고 길갱이, 기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갱이는 고양이란 뜻을 가진 괭이에서 변한 것인데 길가에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이 꼬리 같은 이삭이 달리는 식물에서 길갱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내게는 가장 그럴듯하게 들인다.

수크령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산책길에서 아주 많이 보게 되었다. 이는 수크령이 건조에도 강하고 옮겨심기도 쉽고,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며, 꽃이 오래 가 하천을 정리하면서 그 가장자리에 심었기 때문이다.

꽃이 화려하지 않아도 독특한 개성만으로도 이렇게 훌륭한 조경 소재가 될 수 있다. 잎은 시루의 밑에 까는 걸로 쓰기도 했다 하고, 억세다 보니 풀로 엮는 공예품을 만드는 데도 활용이 가능하다. 꽃이 달린 이삭은 꽃꽂이용으로도 판매된다.

약으로도 쓰이는데 생약명은 낭미초(狼尾草)라 하여 특히 눈을 밝게 하고 결막염 등을 치료한다는 기록이 있다.

계절이 더 깊어지기 전에 수크령이 피어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지난 시간을 한번쯤 차분히 되새겨 볼만한 시기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