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르 이 저자] 수전 손택저서 서 까지대량 복제 이미지가 바꾼 문화 감수성 추적

20세기 혁명가 체 게바라가 21세기 신자유주의 아이콘으로 변질됐듯, 수전 손택 역시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 하나의 이미지-행동하는 지식인, 깨어있는 여성, 미국의 양심-가 됐다.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은 대표적인 미사어구,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란 말은 그 의도를 떠나 이런 인상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사실 대중이 기억하는 손택의 이미지는 영화 <101마리 달마시안>의 모피광 크루엘라를 연상시키는 그 반백의 헤어스타일이 전부 아닌가?)

수전 손택. 1933년 1월에 태어나 2004년 12월 백혈병으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 극작가, 영화감독,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어려서부터 탁월한 지성미를 뽐냈던 그는 15살에 버클리대에 입학, 이후 시카고대로 옮겨 대학생활을 시작한 뒤 17살에 결혼, 25살에 하버드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물론 화려한 이력과 저자의 작품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다. 학계의 '수재'를 넘어 문단의 '지성'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31살이 되던 해 발표한 두 편의 짧은 글, '해석에 반대한다'와 '캠프에 대한 단상' 때문이다.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의 고정된 의미를 찾기보다 예술을 예술 자체로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들으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이 글이 미국 학계와 문단에 주는 충격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예술의 본질은 강간이 아니라 유혹인데,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해석, 즉 지식인들의 틀에 박힌 해석은 예술에 대한 강간이며 이제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새로운 감수성을 '예술의 성애학'이라 불렀다. 이 글을 발표했던 1964년은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가 '소설의 죽음'을 선언해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던 해다. 모더니즘의 종언을 선언한 피들러의 글과 함께 손택의 글은 1960년대 반(反)문화의 서장을 연 기념비적 선언문이 됐다.

손택에 관한 또 다른 이미지 중 하나는 아마도 운동가의 모습일 게다. 그녀는 베트남전쟁의 허위,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을 폭로하는가 하면 미국 펜클럽회장으로 있던 1988년 서울을 방문해 구속문인의 석방을 촉구했다.

1993년 사라예보 내전에 대한 전 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하고자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도 했다.

2001년 9·11테러가 발발한 직후 뉴욕타임스에 칼럼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진 말자'를 발표하고, 이듬해 9·11테러 1주년을 맞이해 역시 뉴욕타임스에 칼럼 '진정한 전투와 공허한 은유'를 발표한다.

그는 이 글에서 "대테러전쟁은 암이나 빈곤, 마약과의 전쟁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은유적' 전쟁에 불과하다"며 "그럼에도 미 행정부가 전쟁을 선포한 것은 미국의 힘을 무한정 사용하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한다. 이 글을 미국 내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받으며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했다.

손택은 첫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1966)부터 <타인의 고통>(2004)에 이르기까지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한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꿔놓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추적해 왔다.

대다수 '세계적 석학'이 번역될 수 없는 독창적 개념이나, 현학적 비유, 복문의 글로 독자를 괴롭히지만, 손택의 글은 짧고 명쾌하며 논리적이다. 미국인 특유의 실용적인 문체가 바다 건너 우리에게도 울림을 주는 건 인간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사유 때문일 터다. 기술 복제 시대 예술의 흐름, 20세기 정치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손택의 글을 하나의 방향타가 될 수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