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르 이 저자] 파스칼 키냐르'마지막 왕국'시리즈 와 번역 출간

사진/송의경
알듯 모를 듯 모호한 말이지만, 매혹적인 말들이 있다.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이 대개 그러하다. 세상의 모든 아침, 은밀한 생,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이제는 고유명사처럼 읽히는 이 말들은 그의 책 제목들이다.

파스칼 키냐르. 194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음악가, 시나리오작가, 번역가, 철학자다. 몇 년 전부터 화두가 된 '통섭'에 가장 어울리는 저자로 꼽힐 듯하다.

음악가 집안 출신의 아버지, 언어학자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식탁에서 오가는 여러 언어(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습득했고, 여러 악기(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익히며 자랐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 등과 함께 철학공부를 했고, 스물한 살에 첫 작품 <말 더듬는 존재>를 썼다. 육순을 넘긴 지금까지 그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숨 쉬듯' 글을 쓰고 있다. 음악(장편<세상의 모든 아침>), 회화(장편 <로마의 테라스>), 언어(장편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등 다양한 코드를 통해 시간과 언어에 대한 독창적 사유를 펼친다.

그의 작품은 일반 독자보다 프로 작가들 사이에서 더 많이 회자된다. 아득하면서도 황홀하게 말하는 파스칼 특유의 화법은 글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매혹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을 터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처럼, 키냐르의 작품 역시 소설과 에세이, 시와 산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장르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장르를 파괴하고 라틴어를 비롯해 9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독창적인 담론을 펼친다. 그러니 그의 소설(소설이라고 하지만 에세이에 가까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기승전결의 서사구조나 인물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다.

대표작 <은밀한 생>은 어떤가. 화자와 M, 네미 샤틀레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90년대의 이탈리아와 중국, 프랑스와 튀니지, 벨기에 등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화자의 기억과 몽상 속에서 소설의 공간은 역사와 신화, 일상을 넘나들며 동서고금의 구석구석으로 확대된다.

기실 줄거리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한 이 작품은 32장의 정교한 구성을 통해 사유와 삶, 허구와 지식을 하나의 몸 안에 뒤섞는다. 제목처럼 텍스트 자체가 하나의 '은밀한 생'인 것. <은밀한 생>을 비롯해 그의 책은 어느 부분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작가는 2000년부터 '마지막 왕국' 시리즈를 집필하고 있는데, 2002년 출간한 1권 <떠도는 그림자들>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이 책에서 그는 탈장르적 글쓰기를 통해 독자와 저자의 구분을 없을 없애려는 열망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이 공쿠르 위원들이 그에게 지지를 보내는 이유(탈장르적 글쓰기)이자 그의 수상을 반대한 이유(공쿠르 심사 대상인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 최고의 작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지난 주 그의 책 <옛날에 대하여>와 <심연들>이 번역, 출간됐다. '마지막 왕국'시리즈의 2,3권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옛날에 대하여>는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시간에 대한 사유'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여기서 작가는 과거-현재-미래로 나뉜 통상적 시간 개념을 '옛날'과 '옛날 이후인 과거' 등 2개의 개념으로 나누어 사고한다.

<심연들>은 세상의 모든 심연들, 즉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든 세계들을 담은 책이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심해, 바닥 없는 우물, <팡세>의 파스칼이 죽을 뻔했다 살아난 뇌이이 다리에서 본 생사의 갈림길, 드물게 찾아오는 무아지경의 순간, 독서…. 책은 이런 파편적 사유로 점철된다.

'사랑한다, 즉 책을 펼쳐놓고 읽다.'(<은밀한 생> 중에서)는 작가의 말처럼, 서늘하면서 아름다운 그의 글은 넘치는 애정으로 두고두고 곱씹어 읽을 때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