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르 이 저자] 필립 로스2008년 출간되면서 국내 본격 소개

상업적인 미국 출판계는 작품의 깊이나 작가의 인지도와 별개로 책의 판매 부수에 따라 작가를 대우하는 것이 관례처럼 여겨진다. 작가는 판매 부수에 따라 5성급 호텔 예우부터, 먼 타국에서 제 발로 걸어 출판사를 찾아가는 수모까지 다양한 대우를 받는다.

작품 출간 전, 편집자와 의논해 작품의 세부 내용을 조정하거나, 아예 편집자가 줄거리를 바꾸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하니 이는 공동작업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대중문학을 차치하고, 현대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중 ‘현직’ 미국 작가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다.

필립 로스(Philip Roth)는 그 몇 안 되는 미국 작가 중 하나다. 조이스 캐롤 오츠와 함께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코맥 매카시,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와 함께 필립 로스를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꼽은 바 있다.

그는 1933년 미국 뉴저지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1959년 유대인의 풍속을 묘사한 단편집 <안녕 콜럼버스>로 데뷔했다. 표제작은 도서관에 근무하는 가난한 청년과 부잣집 여대생 간의 연애를 묘사한 중편소설. 그는 이 책으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며 일약 명성을 떨쳤다.

미국 문학에서 대다수 유대계 작가들이 작품에서 유대인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는 데 반해 필립 로스는 그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작가는 현대 미국 중류층을 배경으로 유대인들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들의 선민의식, 극도의 폐쇄성을 꼬집는다.

한편으로 ‘아메리카 드림’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물질만능주의로 타락해버린 것을 목격한 작가는 오늘의 미국 정치, 사회가 보여주는 아집과 개인주의를 그리는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작품에 섞어 쓰길 즐긴다는 사실. 자신의 분신인 네이선 주커먼이나 데이비드 케퍼시는 50여 편에 이르는 그의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심지어 필립 로스라는 작가의 실명이 그대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50여 년의 작품 활동 동안 퓰리처상 펜포크너상 등 미국 주요 문학상을 스무 차례 이상 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작품이 한국에서 정식 출판 계약을 맺고 소개된 건 2008년 <에브리맨>이 출간되면서부터다. 국내 소개된 그의 작품들은 최근작이 주를 이룬다.

2003년 로버트 벤턴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장편 <휴먼스테인>. 2000년 발표한 이 소설은 미국 뉴잉글랜드 시골을 무대로 보수와 진보의 대립, 정치적 올바름, 빌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로 떠들썩했던 199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의 화자는 예순다섯 살의 작가 네이선 주커먼. 작가의 분신 같은 네이선 주커먼은 1997년 발표한 <미국의 목가>, 이듬해 발표한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도 등장한다. 이 세 작품이 ‘삼부작’으로 읽히는 이유다.

2008년 <울분>과 2006년 <에브리맨> 역시 나란히 읽힌다. 전자가 1950년대 초 열아홉 살 청년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50년 후 일흔한 살 나이에 숨을 거둔 노인의 이야기다. 이들 역시 작가 필립 로스와 동세대 인물. 그러나 <울분> 속 주인공의 삶은 지금 젊은이들의 처지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놀라운 흡입력을 자랑한다.

그의 작품은 모두 현대 미국사회와 보편적 인간의 삶을 그려내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무미건조하면서도 명확한 그의 문장은 고전 소설의 문체를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