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르 이 저자] 모리스 블랑쇼프랑스 작가 사상가, 문학비평가 '죽음의 선고', '문학의 공간' 출간

"지금도 첫 구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때, 왼손에는 벤야민, 오른손에는 블랑쇼를 들어요."

지난 여름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를 만났을 때 들은 말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꽤 많은 문화예술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흩어지듯 모호한 말, 딱 잘라 정의되지 않는 난해한 생각들이 이들에게 영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인 듯싶다.

그의 책은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후기구조주의자들부터 낭시·라쿠, 아감벤 등 최근에 논의되는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철학자들의 준거점이 됐다.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우리나라의 평론가와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한번쯤 관심 가져 볼 만한 저자다.

모리스 블랑쇼. 1907년 태어나 2003년 타계한 프랑스의 작가, 사상가, 문학비평가다. 젊은 시절 몇 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것을 제외하면 평생 글쓰기에만 전념했다. 철학, 문학비평, 소설 등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고 특히 문학에서는 말라르메를 전후로 한 거의 모든 프랑스 전위 문학 흐름에 대해 깊고 독창적인 성찰을 보여주었다.

그의 지적 여정에 함께 한 친구들 역시 '레전드'급이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만나 일생 동안 우정을 나누었고, 이후 두 사람은 '타자의 철학'을 제시했다. 1940년 조르주 바타유를 알게 됐고, 두 사람은 우정과 공동체의 사상을 함께 추구해 나갔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개념어를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블랑쇼의 개념어는 '끝날 수 없는 것', '끊임없는 것', '중성적인 것', '바깥', '본질적 고독' 등이다. 그는 책을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각 책에서도 상당히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는데(예를 들어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일은 거의 없고 상황이나 생각을 암시하는 말만 늘어놓는다.) 이 말을 논리구조나 기승전결로 정리하다 보면 내용이 전무해져 버린다.

요컨대 그의 말은 끊임없는 반복의 일렁거림만 남기고 흩어져 버린다. 어렴풋한 말의 끊임없는 되풀이, 그 되풀이 끝에 돌아오는 침묵의 공허만을 남기는 것이 블랑쇼 글의 특징이다. 비평 역시 무척이나 정밀한 언어로 그 언어들 사이의 침묵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질문하고 있다.

'우리가 한 모든 말들은 단 하나를 긍정하는 데로 나아간다. 즉 모든 것이 지워져야 한다는 것. 우리 안에 있으면서 모든 기억을 거부하는 어떤 것이 이미 따라가고 있는 이 움직임에, 지워져 가는 이 움직임에 주목함으로써만 우리가 충실한 자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조르주 바타유에게 헌정한 이 글(추모사 '우정')은 모리스 블랑쇼의 생각을 집약하고 있다.

문학의 밑천인 말을 흩뜨리며 문학을 증명했듯, 그는 철학 역시 철학의 밑천인 존재의 한계·부재를 통해 급진적 사유를 드러낸다. 예컨대 블랑쇼의 언어 중 '중성적인 것'을 통해 그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모든 동일성의 신화와 결별하는 문학의 결정적인 힘을 말하고 있다.

"물음을 가져오는 글쓰기를 추진하는 물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그 물음인 글쓰기, 그것은 네가 세계의 과거 가운데 어느 날 받아들였던 존재(전통·질서·확실성·진리 그리고 모든 유형의 정착으로 이해되는 존재)와의 관계를 더 이상 네게 허락하지 않는다."

최근 블랑쇼의 대표작 <죽음의 선고>와 <문학의 공간>이 출간됐다. 재작년부터 그린비 출판사가 출간하고 있는 '모리스 블랑쇼 선집'의 1, 2권으로 들어간 작품들이다. <도래할 책>, <기다림 망각>을 비롯해 그의 후기철학을 집대성한 <무한한 대화> 등 대표저서가 거의 모두 번역됐다.

글쓰기의 아득함이란 무엇일까? 예술의 공허는 무엇을 남기나? (이런 말은 얼핏 무용한 것 같지만, '죽을 거면서 왜 살까?' 같은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블랑쇼의 책은 그에 대한 가장 세련된 대답이다. 기승전결의 논리구조 없이 한 권의 시집처럼 그저 문장만 읽어도 황홀하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