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교수 '지금-여기' 문화비평 통해 사회 가치체계 밝혀

애드거 앨런포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는 간악한 계략가인 D장관이 왕비의 비밀편지를 훔치면서 시작된다. 도둑맞은 편지로 곤경에 빠진 왕비는 파리 경시청장에게 수사를 의뢰하지만 실패하고, 이 사건을 사설탐정 뒤팽에게 의뢰한다.

소설은 이러저러한 전개 끝에 장관이 뒤팽에게 당하는 반전으로 끝난다. 하지만 소설책을 덮을 때까지 정작 편지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타인이 원한다는 확신 때문에 모든 사람이 욕망하게 되는 이 비밀편지는, 기실 실체 없는 '텅 빈 공간'인 셈이다.

19세기 소설을 21세기 현실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요즘 남자들의 이상형이 김태희, 여자들의 워너비가 현빈이란 사실은 '개인 취향들의 합'이 아니라, '김태희, 현빈이 대세'라는 심증의 결과다.

대중문화 아이콘으로서 김태희와 현빈은 실체가 아니라 대중의 욕망이 만들어낸 '텅 빈 공간'이라는 말이다. 헌데 이 집단적 욕망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책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자음과모음)는 대중의 욕망이 발생하는 매트릭스를 설명하고 있다.

'지금 여기'를 보는 눈

이택광 교수의 전공은 영미문화다. 그는 정치, 경제 이슈는 물론 영화, 드라마,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해 '지금-여기'를 말한다. 예컨대 <나가수> 열풍에서 신자유주의 경쟁시스템을 보고, 휴대폰을 통해 거울사회의 징후를 설명하는 식이다.

왜냐하면 "모든 대중문화는 정치적인 함의들을 감춰두고 있기(10페이지, 서문)"때문에. 책은 200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시네21>, <경향신문> 등 매체와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을 묶어 3부로 나눴다.

1부 '철학과 비평 사이'는 이전 세대 문화비평가들에 대한 저자의 주관적 읽기다. 2000년대 정치사회 이슈를 분석한 2부 '사회와 정치 사이', 대중문화와 유명인으로 살펴본 3부 '문화와 인물 사이'로 이어진다.

국내에서 대중문화비평은 신방과 교수나 연예기자가 드라마 가십을 말하는 것쯤으로 치부됐다. 저자는 서문에서 니체, 벤야민 등을 문화비평가로 소개한다. 문화비평을 꽤 넓은 영역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비평은 원래 독일식 개념이다. 우리나라 문화철학으로 알려진 컬처 크리틱(Kulturkritiker)은 철학적 방법론이다. 문화철학보다 문화비평으로 번역돼야 한다고 보는데, 왜냐면 이 말은 기존의 어떤 제도권 철학을 표방하는 게 아니라 제도 철학이 다루지 못하는 내용이나 사유를 말한다.

문화는 쾌락의 문제고 욕망의 문제이지 않나. 예컨대 칸트가 어떤 사회문제를 절대적 이성의 기준으로 비판했다면, 문화비평은 사회의 이런 가치체계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밝힌다.

문화비평의 미덕은 형식을 통해 내용의 논리를 드러낸다는데 있다. 우리는 언어나 코드라는 형식을 떠나서 리얼리티를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리얼리티는 형식을 갖는다. 이 형식에 각인돼있는 내용의 논리를 파악하는 일이 문화비평이다."

동세대 문화비평가로 예를 들어준다면?

"프레드릭 제임스, 주디스 버틀러 같은 사람들. 슬라보예 지젝도 유사한 작업을 한다. 제임스는 좀 벗어나 있지만 다들 철학자다."

이 책 1장의 흑인철학자 얘기가 인상 깊었다. (그는 책에서 흑인이나 자신 같은 동양인이 서양 백인 학문을 공부하고, 사유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한다고 밝혔다.) 문화비평도 그렇지만 경제나 정치를 논할 때도 한국 지식인들은 미국이나 유럽같은 서양기준을 들이댄다.

"나도 그런 것에 비판적이다. 이론을 적용해서 현상을 분석하는 것 말이다."

기자도 이런 식의 행태를 지양하면서도, 아는 지식을 토대로 특정 정보를 분석해 전달할 때가 많다. 이택광 교수도 어떤 개념이나 이론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문화 현상이 보이는 게 아닌가.

"개념이 있어야 현상이 보이는 건 맞다. 나는 개념을 원근법이라고 하는데, 어떤 위치에 소실점을 두느냐 따라서 풍경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론은 소실점과 같은 거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개념을 녹이고 소화한다는 말인데, 나는 사유의 힘은 관찰에서 나온다고 본다. 헌데 관찰한 것을 고정시켜야 사유로 만들 수 있지 않나. 내가 공부한 이론은 관찰의 고정핀 같은 것이다."

그런 고정핀으로 기준 삼는 문화비평가로 예전에 벤야민을 들었다. 벤야민의 문화비평 핵심 중 하나는 기술비평이다. 그는 20세기 영화, 사진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다. 이 책에서 핸드폰, 인터넷 게임 같은 21세기 기술에 대해 쓰고 있지만, 내용은 많지 않다.

"나중에 쓸 거다.(웃음) 스마트폰과 인문학이란 책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다. 거기서 기술문제를 다룰 생각이다."

이 책에서 휴대폰을 통해서 거울사회 징후를 짧게 언급했다. 스마트폰과 휴대폰은 서로 다르다고 본건가?

"전체흐름은 큰 차이가 없다. 스마트폰은 휴대폰의 일정부분, 그러니까 웹과 전화가 결합되는 부분이 극대화 된 기계다. 휴대폰은 전화기 속에 인터넷이 부속으로 들어온 형태이지만, 스마트폰은 인터넷 속에 전화기가 부속으로 들어와 있다. 이는 내 손안에 인터넷이 들어왔다는 걸 의미한다.

벤야민이 그 시대(1920년대) 사진이 영화를 꿈꾸었다고 말하지 않는데, 마찬가지로 스마트폰과 휴대폰 원리를 보면 휴대폰 시대에 이미 스마트폰을 지향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발달하면 말 그대로 유비쿼터스 시대로 간다."

책 읽으며 유영철, 김일병 사건이 참 오래 전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이내믹 코리아'라서 그런지 책이 묶이는 동안에도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최근 재미있게 관찰한 문화현상은 뭔가?

"<나가수>로 대표되는 서바이벌프로그램이다. <나가수>에 실질적으로 깔린 철학은 신자유주의다. 아티스트들이 자유경쟁하고, 취향의 문제가 포퓰리즘으로 해결된다. 그리고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예술가들은 예술 활동만으로 못 먹고 산다. 뭔가 대중의 투지가 필요한데, 그걸 보여주는 게 <나가수>다.

한국에서 자본을 축적하려면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어떤 자본가도 고고하게 있을 수 없고, 대중의 사용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명확하게 들어맞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헌데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런 현상을 의도하고 만드는 게 아니다. 이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문화비평가의 몫이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표지 사진은 쉐인 윌리스(Shane willis)의 를 썼다. 내가 선정한 건데(웃음), 지향하는 문화비평의 주제를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손을 조립하고 있는데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묻는 것 같다. 본질주의자에게 문화비평은 쓸 때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본질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문화비평이다. 영화 <박하사탕>의 수사관들은 타인을 고문하면서 자기 일상을 걱정한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런 현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악은 아주 평범한 곳에서 발생하고 그 속에는 본질이 없다고 말이다. 홀로코스트 같은 일이 왜 벌어지는지, 우리사회 문제들이 어디서 발생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문화비평이 필요하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