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장욱 세 번째 시집 펴내익숙하면서 낯선, 모호하고 무심한 말 속 세련된 감수성 빛나

시와 소설, 평론 등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 이장욱이 세 번째 시집 <생년월일>을 냈다. 5년 만에 내는 이번 시집에서 그는 예의 세련된 감수성을 선보이며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실재를 서늘한 눈빛으로 꿰뚫어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호하고 무심한 말은 한 편으로 아득한 세계 속을 떠돈다.

그는 문학이다

부박한 감상법이지만, 시집을 읽기 전에 시인의 이력을 소개한다.

이장욱은 김행숙, 김민정, 황병승 등의 첫 시집에 해설을 썼다. 그는 2000년대 중반 주목받은 시인들의 낯선 화법을 '다른 서정'으로 옹호하며 시단에 '미래파' 논쟁을 일으킨 평론가이자 그 스스로 탁월한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하다.

<내 잠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최근 나온 <생년월일>까지 세 권의 시집을 냈다. 2005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문학수첩작가상을 받으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글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감각적인 이미지 묘사는 박진감이 넘친다. "동세대 작가, 작품에게 영향을 받느냐?"란 질문에 "개인적으로 끌리는 것은 철학서"라고 답했다.

국내 문단에서 시로 등단해 소설을 쓰거나 그 반대의 활동을 하는 문인이 꽤 있지만, 시와 소설, 평론을 완벽하게 별개의 작품으로 쓰는 문인은 드물다. 그런 작업을 하는 '현역'은 이장욱이 거의 유일하다.

허나 한 사람이 쓴 작품이니 당연히 연결고리도 있을 터, 기자가 보기에 그것은 견고한 세계에 대한 불안, 불안에서 파생되는 중얼거림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단편집 <고백의 제왕>의 수록작 대부분에 환상, 환각에 사로잡힌 인물 혹은 숫제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유령들이 등장한다는 것. 이들이 때때로 시공간이 뒤틀리는 플래시백을 경험한다는 것. 그리고 시에서는 이렇게 드러난다는 것.

'당신은 뚜껑으로 닫을 수 없다./ 모자라든가 자동문/ 오늘의 뉴스로도.// 마치 물로 만든 의자처럼/ 누군가 거기 앉으면 풍덩,/ 빠져버릴 것처럼.// 햇빛이 당신을 넘치고 그녀의 말이 당신을 넘치고/ 가정의 평화와 일기예보 역시./ 당신은 또/ 당신에게서 벗어난다.' (시 '흘러넘치다' 중에서)

이 플래시백과 중얼거림은 세계가 감추고 있는 어떤 균열이나 폭력, 혹은 욕망이나 억압된 타자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 타자에 귀 기울이며 나름의 윤리를 찾는 것이 그의 시작(詩作)인 셈이다.

첫 시집부터 펼쳐진 이 낯선 풍경은 이번 세 번째 시집에서도 이어진다.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고요한 세상'의 해체(첫 시집<내 잠속의 모래산>)와 '자아의 실종'(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에 골몰했던 시인은 이제 "입 벌리는 순간/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시 '생년월일')나고 "곰곰 생각하고 생각한 후 간신히 생일 다음에 온 불안에 대해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시 '당신이 말하는 순서')

이장욱 시인께

안녕하세요, 세 번째 시집을 받고 반가운 마음에 편지 보냅니다. 작가께서는 세 번째 시집 받으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저는 시 표제 '생년월일'이란 말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이장욱 작가의 시, 소설, 평론 지점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번에 반대로 작가의 시집과 소설, 산문을 연결해 읽기로 했습니다. 꼼꼼히 읽다보니 시와 소설, 산문의 사유들이 연결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예컨대 시 '그라운드'와 단편 '변희봉'에서 야구의 클라이맥스에서 정지장면, 시 '생년월일'과 단편 '변희봉'에서 정지상태가 먼 후일 다시 진행되는 상황, 시 '당신이 말하는 순서'와 단편 '고백의 제왕'의 의도하지 않은 발화 등 말이지요. 예전 한 인터뷰에서 "시론은 이성의 영역이고 시는 몸의 영역이다. 나의 시론은 나의 시를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평론도 어느 지점에서는 이런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 시나 소설을 먼저 쓰고 그 작품을 모티프로 다른 장르 작품을 쓴 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이장욱 시인의 시는 이야기와 감각의 덩어리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작품에서 몇 개의 단절된 이야기들이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의 풍경을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시를 쓸 때 시인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나요?

너무 시집 이야기만 했네요. 광주에서 생활은 어떠신가요? 저는 요즘 데리다 <그라마톨로지>를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이 책과 연관해 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이번 시집의 꽤 많은 작품들을 절대적 현전의 불가능성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한다든지 말이지요.

그럼 남은 여름 잘 보내세요. 편지 이만 줄입니다.

이번 시집을 낼 때 '생년월일'이라는 제목이 묘하게 끌렸습니다. 이 건조한 어휘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고유함의 느낌, 시간의 느낌, 시작의 느낌, 전환의 느낌, 모종의 생명력 등등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간결하기도 하고요. 시집내고 나와 나 자신의 사이에, 나와 타인들 사이에, 나와 독자들 사이에 작고 위태로운 징검다리 하나 놓은 느낌입니다. 건너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시와 소설, 산문의 연관성은 저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이 쓴 것이니 장르를 불문하고 연결돼 있는 건 당연하겠지요. 시론이 시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건, 제가 제 시를 설명하기 위해 시론을 쓰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나아가서는 제가 시를 로고스나 논리의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곳에서 만난다는 의미입니다. 모티프가 비슷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시를 쓰고 이를 모티프로 소설 적이 한번 있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늪'이라는 시가 단편 '어느 날 욕실에서'의 모태입니다. 하지만 장르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인지 결국에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되더군요.

시를 쓸 때 저는 서사를 도입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 상황 속의 인물, 인물의 느낌 등은 있지만, 이것들이 이야기나 내러티브의 요소라고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내러티브가 성립하려면 그것들의 인과적 연속성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기자님 질문을 읽고 보니 그런 작품들이 있군요. '드라마' 같은 게 대표적이겠습니다. 이것도 사실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만. 데리다 <그라마톨로지>를 이 시집과 연결해 읽었다고 하셨는데, 연장선에 있으면서 차이가 있겠지요.

저는 요즘 장편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아직은 이야기들이 몸을 얻지 못한 상태입니다. 시작도 못했네요. 편지로 주신 질문에 답을 적긴 했습니다만, 그냥 독자의 느낌으로 읽어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편지 고맙습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