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대기업 '생존법'을 찾다

지구촌 도처에서 경제위기 징후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도 물가상승과 경기침체 기조가 뚜렷하다. 아무리 씀씀이를 줄여보지만 몇 달 사이에 수천만 원이 올라버린 전세 보증금, 리터당 2000원에 이른 휘발유값, 실질구매력이 반토막 난 1만원 권으로 장을 보는 서민들의 한숨은 조금씩 분노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데는 재벌 대기업들이 서민경제를 악화시킨 책임도 적잖다. 재벌 일가가 최대주주인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고 매출 폭증을 통해 기업가치를 증가시키는 경우, 그 비상장 계열사의 사업내용 중에는 당초 중소기업이나 중소상인들의 밥벌이를 빼앗은 것들도 여럿 눈에 띈다. 골목길 구멍가게들까지 대기업 간판을 내건 편의점으로 둔갑해 상호를 바꾼 구멍가게 주인도, 거기서 물건을 구입하는 동네 사람들도 모두 손해를 보는 것은 대기업이 죄다 물류를 장악한 탓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라는 용어가 낯익을만하니까, 무책임 경영의 사례들이 도처에서 목도되고 있다.

MB 기업정책의 공과 숙제
대기업에 대한 민심이 험악해졌음을 정부가 모를 리 없다. 집권 하반기 이명박 대통령이 재계를 향해 불편한 주문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재계로서는 취임 당시 ‘기업 프렌들리’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로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컸다. 대통령도 자신의 개발정책에서 기업들의 역할을 기대하며 ‘규제완화 할 테니 과감히 투자해 달라’고 ‘호탕한’ 약속을 했다.

그런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월 30대 그룹 회장단과 만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언급했다. 임기 절반을 해보니 기업경영 할 때처럼 국가경영이 녹록한 게 아니었던 셈. 급거 ‘대기업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를 지적했고, 재벌가 사람들이 최대주주로 있는 삼성과 SK, 한화 등의 소모성 자재구매 대행업체(MRO)들이 사업을 접기로 했다.

MB정부는 동반성장(처음엔 ‘상생’이라고 했다)을 위해 원청 대기업이 협력업체로부터 기술만 빼먹고 거래를 끊는 몰염치한 행위를 자행한 경우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입증책임을 원청 대기업이 하도록 했다. 이런 내용을 뼈대로 최초로 대기업이 협력업체에게 피해액의 3배에 이르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도급법’을 고친 것. 하청 중소기업들은 ‘작지만 알찬 선물’로 반겼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해 △중소기업 고유 업종 △하청 중소기업 납품단가 후려치기 관행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확대 △집단소송제도 확대 등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정부에 요구하는 기업정책안들은 아직도 청와대에 켜켜이 쌓여있다.

환경규제 대응으로 좁아지는 CSR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독려하는 각종 단체나 이니셔티브들은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환경 편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CSR 관련 단체들조차 인권과 노동, 소비자, 공정거래 등 환경 이외의 분야에서 활약이 둔화된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는 지구촌에 존재하는 모든 단체와 기업, 조직들의 사회적 책임 수준을 정해 하나의 권고적 잣대로 삼자는 취지에서 사회책임가이드라인 'ISO26000/SR'을 만들었다. 지난해 11월1일부터 ISO26000/SR은 인권과 노동, 환경, 소비자 이슈, 공정거래관행, 지역사회 공헌, 지배구조 등 7가지 분야의 기준을 통해 기업을 비롯해 정부조직과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 모든 조직들이 추구해야할 ‘공식 사회책임 잣대’가 됐다.

ISO26000은 그러나 국제표준화기구의 다른 기준, 가령 환경경영기준(ISO14001)과 같은 취득 인증 등이 없는 ‘권장 기준’인 까닭에 아직은 컨설턴트들의 서재에서, 혹은 상공회의소 기업교육장에서 회자될 뿐 바깥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아직 신상필벌이 분명하지 않은 국제기준을 소화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셈이다.

대신 투자자 영역에서는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나 다우존스지속가능경영지수(DJSI) 등이 국제사회에 발맞춘 환경경영 성과를 고무하면서, “환경경영 잘하는 기업이 주가도 높다”는 교리를 퍼뜨리는 데 여념이 없다. 주가 높은 기업이 앞서 ‘착한 기업’에서 최근 ‘환경경영 잘하는 기업’ 또는 ‘지속가능경영 우수기업’으로 바뀐 것 빼고 달라진 게 별로 없다.


CDLI2011 : CDP 선정 2011 탄소정보공개 우수기업군
CPLI2011 : CDP 선정 2011 탄소감축성과 우수기업군

사회책임 성과 높은 대기업이 주가도 높다
최근 기업들이 이처럼 자사의 주가를 더 높이기 위해 환경경영 이니셔티브 등 지속가능경영 가이드라인을 섭렵하는 것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ISO26000의 7가지 사회책임 잣대를 들이대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기업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의 한국기업들은 테마를 따라 움직인다. MB정권이 들어선 뒤 ‘녹색테마’가 유독 도드라진 것도 우연은 아니다.

최근 영국에 본부를 둔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arbon Disclosure Project)는 “세계500대 기업 중에서 자사의 탄소정보공개에 적극적이고 탄소배출을 줄인 성과가 높은 기업들(그래프에서 보라색과 주황색 추세선)이 주식시장에서 평균보다 2배가량 높은 투자성과(배당금 또는 자본이득과 이자수입의 합계)를 보였다”고 발표했다.

폴 심슨(Paul Simpson) CDP 대표는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기업이 재무적으로도 더욱 우수한 성과를 가져온다는 이번 결과는 기업들이 왜 온실가스 관리 및 감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환경·사회·지배구조(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ESG) 성과와 재무성과가 밀접하다는 주장은 사회책임투자 전문 리서치회사로 수년째 한국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수준을 평가해온 서스틴베스트의 보고서에도 잘 나타난다.

이 회사가 국내 상장 400개 기업을 분석해 9월초 발표한 2011 평가결과에 따르면, 환경·사회·지배구조의 평가영역에서 우수한 성과를 낸 AA 등급 기업들(아래 그래프)의 주가수익률은 3년 6개월간 코스피 200지수를 31.20%나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CSR 기본기와 진정성으로 해야
주가와 사회책임성과의 동조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보다 일반적 범주에서 대기업들의 재무성과(주가)가 과연 ‘대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성과’ 전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착해서 주가가 높은 것인지, 주가가 높으니 착한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잘 나가는 대기업이라서 주가가 높고 여기에 ‘착한’ 이미지가 덧 씌워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뒤따르는 이유다.

지난 2004년 이후 환경과 인권 등의 테마로 설정된 펀드의 추이를 분석해온 펀드분석가 임창성씨는 “한국거래소의 사회책임투자 지수(KRX SRI)와 코스피 대형주와의 상관관계를 보면 거의 99.9%가 일치한다”면서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잘한다는 얘기인데, 일반투자자들이 두루 공감할 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환경성과나 기부 등 사회공헌을 테마로 한 펀드 대부분이 대형주라는 사실은 기업지배구조와 인권, 소비자이슈, 공정거래 등 다른 사회책임지표들을 두루 통찰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CSR과 사회책임투자(SRI)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기업의 덫 기업지배구조
한국기업들에게 기업지배구조는 가장 취약한 분야다. 제발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을 정도로 싫은 지표다.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가 아시아 11개국 580개 기업들을 대상으로 기업지배구조를 분석한 결과 한국기업들은 조사대상 11개국 중 9위를 기록한 예가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딱 2개 나라만이 한국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지난 8월초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한국의 상장기업 668곳을 대상으로 환경․사회․지배구조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종합 평가 결과 86%가 “매우 취약”으로 나타났다. 최우수등급을 받은 기업은 포스코와 SK텔레콤, KB금융, 하이닉스 등 단 4곳뿐이었다. 한국기업들은 매출액과 상관없이 CSR 또는 지속가능경영 분야에서 매우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뉴욕타임즈는 최근 보도에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지난 2007년 법원의 유죄판결 당시 오는 2013년까지 8400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하고 지난 8월 28일 이중 5000억 원 상당의 현대글로비스 주식을 그룹 사회공헌재단인 해비치 재단에 출연, 약속을 지켰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유종일 KDI교수는 같은 기사에서 멘토로 등장, “재벌이 이윤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거야 좋은 일이지만, 그 이전에 법을 제대로 지키고 공정경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스코, 지속가능성 높은 한국기업

편식 않고 꾸준한 노력, 여러 분야서 높은 지속가능성 인정

영국에 본부를 둔 글로벌 금융투자 프로젝트인 CDP는 지난 2003년 이후 매년 글로벌 상위기업들을 대상으로 탄소배출과 절감노력 등을 공개토록 요구해 이를 충실히 따르는지 여부에 따라 신상필벌(?) 해왔다.

올해 CDP의 글로벌500에는 삼성전자와 포스코,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LG화학, 신한금융지주, KB국민은행, 한국전력, 현대중공업, 삼성생명 등 한국 기업 10개도 포함됐다. 이들 중 한국전력과 현대중공업, 삼성생명은 CDP의 요청을 거절했다.

삼성전자는 한국기업 중에서 탄소정보공개 우등생 그룹에 유일하게 편입됐다. 탄소감축을 위한 노력 부문에서도 2년 연속 상위그룹에 속했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CDP는정보공개 우등생그룹 52개 회사 중 3년 연속 자리를 지킨 기업은 13개, 정보기술(IT)산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시스코 시스템즈(Cisco Systems) 뿐이라고 칭찬을 했다. CDP한국위원회(위원장 장지인 중앙대 교수)는 “이로써 삼성전자는 기후변화 관련, 기업의 이미지와 명성을 지속적으로 높이고, 세계 551개 기관투자자들의 투자 가능성을 높였다”고 밝혔다.

우등생 그룹에 포함은 못했지만 포스코는 차점자그룹에 속한 26개 회사 중 철강기업만을 놓고 비교했을 때 최고로 꼽혔다. 지구촌 경쟁사인 일본제철(Nippon Steel)과는 성적그룹 기준 2단계, 낙제점을 받은 아르셀로미탈보다는 무려 4단계를 앞섰다.

CDP한국위는 반면 2011 CDP에 불참한 한국전력에 대해선 “발전 자회사 포함 한국 내 온실가스 배출량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유틸리티 회사가 2년째 불참했다”면서 “글로벌500 유틸리티 기업26개 회사 중 2년 연속 불참한 기업은 한전 포함 4개 뿐”이라고 비판했다.

서스틴베스트가 국내 상장 400개 기업을 분석해 9월초 발표한 바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옛 SK에너지)과 LG화학, 포스코, 현대건설 등이 산업별 지속가능성이 우수한 기업으로 선정됐다.

또 두산인프라코어(기계)와 현대자동차(자동차), 웅진코웨이(내구소비재), LG생활건강(필수소비재), 대구은행(은행/카드), 삼성화재해상보험(보험), 신한금융지주(금융지주), 하이닉스반도체(반도체), LG전자(가전), 삼성전기(전기전자장비), KT(통신서비스)등이 산업별 지속가능경영 리더로 꼽혔다.

기업지배구조(한국기업지배구조원)를 포함해 탄소경영(CDP), 종합 지속가능성(서스틴베스트) 등을 모두 순위권 안에 기업은 포스코가 유일하다. 3가지를 통틀어 2개 이상 순위에 든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LG화학, 신한금융지주, 하이닉스, KB금융 등이다.



이상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