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1만원대 불티·캐주얼 와인바 속속 편하게 즐기는 문화 확대

와인문화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와인바가 생기는 등 무거운 격식을 벗어던진 분위기에서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속속 생기고 있다. 이 같은 캐주얼 와인바에서는 주로 2~3만원 대의 중저가 와인이 소비된다. 분위기 있는 와인바나 고급 레스토랑 등에서 5만원 이상의 와인이 팔리는 것에 비하면 매우 실용적인 가격이다. 와인은 '고급 비싼 사교용 술'이라는 통념을 깨고 등 1만원 대의 와인이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또, 기존의 보수적인 와인소비 문화에 딴지를 걸 듯, 신선한 발상의 와인 마케팅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호주와인인 '옐로우테일'은 '플레이 바이 유어 룰(Play by your rule)', 즉, '네 멋대로 즐려라'는 광고 캠페인을 펼치며 새로운 와인 문화 만들기에 나섰다.

이 캠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미국, 일본, 한국 등 전세계 37개국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격식에 찬 기존의 와인문화에서 벗어나 눈치보지 말고 당당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와인을 즐기라는 의미를 전하고 있다. 옐로우테일은 라벨도 파격적이다. 와인라벨에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를 없애고, 검은 바탕에 노란색 캥거루를 그려 대중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와인이 클럽 파티에 등장하는 것도 이색적이다. 롯데아사히주류는 지난 주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스파클링 와인인 '버니니' 재출시를 기념해 청담동 클럽 앤서(Club Answer)에서 런칭 파티를 열었다.

버니니는 와인잔 없이 맥주처럼 한 손에 병째 들고 마시는 와인. 그날 파티에는 캐주얼한 와인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듯 일렉트로닉 씬의 살아 있는 신화, 독일 출신의 트랜스 듀오 '코스믹 게이트'가 초청돼 공연을 가졌다.

'와인의 대중화'로 대변되는 이 같은 와인문화의 변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미국, 칠레, 남아공 등 이른바 '신대륙 와인' 들이다.

■ 한풀 꺾인 프랑스와인 인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세계에서 프랑스의 보졸레누보가 동시에 출시되는 11월 셋째 주 목요일은 국내 와인 애호가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신제품 출시 때가 되면 호텔 등에서 보졸레누보 파티로 떠들썩하고, 고급 레스토랑과 와인숍에는 예약주문이 밀려들었다. 이 시기 가 되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전세기까지 동원돼 보졸레누보를 실어 날라야 했다.

그런데 점차 보졸레누보 와인 열기가 식어가는 듯하더니 올해는 이상하리만큼 잠잠하다고 와인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물론 경기불황에 따른 전반적인 와인소비의 감소가 가장 큰 이유 이겠으나 시들해져 가는 프랑스 와인의 인기를 반영하는 게 아니냐는 시선도 많다.

국내 소비자들이 와인을 처음 접한 것이 고급와인의 대명사 프랑스 와인이다.

그래서인지 와인 하면 무조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연상하는 게 보통이었다.

와인 마케팅에도 유난히 고급이미지가 강조됐다.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속설을 입증하듯 와인 업체들은 고가 정책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학파들 중에는 현지에선 몇 천원만 주면 살 수 있는 와인이 국내에선 5만원 이상 고가의 와인으로 탈바꿈한다며 쓴소리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우리 와인가격은 이웃나라 일본보다도 평균 6배 정도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류세를 감안하고라도 와인 가격이 유난히 비싼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프리미엄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와인 값을 부풀리지 않았느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프랑스 와인 인기에 이어 이탈리아 와인도 마니아 사이에서 호응을 얻었다.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고가의 구대륙 와인이 많이 팔렸고, 대기업 총수들까지 주요 명절 선물로 고급 와인을 선택하기 일쑤였다.

이들 구대륙 와인을 제대로 선택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와인공부가 필수다. 와인강좌를 통해 까다로운 전문지식과 엄격한 에티켓을 익힌 고양 있는 애호가들이 숱하게 양성됐다.

국내 한 사회학자는 “와인은 술이 아니라 이미지”라며 고급화된 와인문화를 설명하기도 했다.

구대륙 와인이 지배하는 와인문화는 어느덧 문화적 우월성과 자부심을 대표하게 돼 고급 신차 발표회 등 각종 VIP마케팅에도 와인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됐다.

기아차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오피러스 고객 200커플을 초청, '오피러스와 함께하는 프랑스 와인 축제'를 열었다.

■ 신대륙 와인 판매량 구대륙 와인 추월

그런데 최근 신대륙와인이 인기를 끌면서 와인문화가 바뀌고 있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 대신 소박한 분위기의 와인바를 찾는 이들이 늘고, 대형마트에서 저렴한 가격대의 와인을 구매해 집에서 즐기는 이들도 부쩍 늘어난 것이다.

와인동호회 회원 엄석종 씨는 “와인동호회 회원들은 대체로 와인 마니아들이지만 특별한 날을 빼고는 할인마트에서 1~2만 원대 합리적 가격의 와인을 사서 집에서 마시거나, 친한 사람들과 모여 마시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제 와인 애호가들이 일종의 허영을 벗고, 와인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엄 씨는 “샤토 탈보 같은 괜찮은 구대륙 와인을 맛보려면 마트에서 10만원은 줘야 하지만 신대륙 와인은 2~3만원만 줘도 비슷한 품질의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와인 신흥국인 신대륙 와인의 가장 특징은 구대륙 와인보다 숙성기간이 짧아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소믈리에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구대륙 와인의 3분의1 가격이면 대체로 비슷한 품질의 신대륙 와인을 마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굳이 비싼 와인만을 고집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또, 와인을 잘 모르는 초보자라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신대륙 와인의 매력이다. 유럽 와인은 제조회사와 포도재배지역이 강조되는 반면, 신대륙 와인은 어떤 품종의 포도로 만들었는지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칠레 와인인 ‘에쿠스 까르베네 쇼비뇽’은 100% 까르베네 쇼비뇽으로 만든 와인이다.

와인숍 텐투텐 박민숙 대표는 “유럽처럼 라벨 표기가 까다롭지 않아 와인을 모르는 초보자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게 신대륙 와인”이라고 말한다.

“와인을 마실 땐 ~하라”는 에티켓을 강조하지 않는 것도 신대륙 와인의 특징이다.

비싸고 어려운 구대륙 와인에 부담을 느꼈던 사람들이 신대륙 와인으로 쏠리고 있다.

신대륙 와인 판매가 최근 구대륙 와인을 앞질렀다.

와인유통업체 와인나라의 관계자는 "신대륙 와인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해 3년 전부터는 구대륙 와인의 판매량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 신대륙 와인 열풍 각계각층으로 전염

와인나라의 경우 강북에서 판매되는 와인의 70% 가량이 신대륙 와인이다. 반면, 강남에선 신대륙 와인 판매가 절반을 조금 넘는다.

또, 와인평론가 등 전문가들의 평가는 아직까지는 “하나의 품종으로 만들어진 신대륙 와인은 3~4가지 품종을 블렌딩한 구대륙 와인의 섬세함과 깊이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식이다. 신대륙 와인의 소비층도 와인 초보자가 주를 이룬다.

주요 판매처도 대형마트나 캐주얼 와인바가 많다. 자연히 나이든 세대보다는 신세대 고객이 신대륙 와인을 더 많이 찾게 된다.

그러나 신대륙 와인 선호현상은 초보자나 강북 등 일부에 머무르지 않고 각계각층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그랜드 하얏트 호텔의 경우, 프랑스 레스토랑 ‘파리스 그릴’과 일식당 ‘아카사카’ 등 최고급 레스토랑의 비즈니스 모임에서 가장 선호되는 와인이 미국 와인인 ‘끌로뒤발 까베르네 쇼비뇽’이다.

이 와인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한 때 대통령 만찬에도 사용됐으며, 부시대통령 방한 만찬에서도 사용됐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 만찬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외빈초청 만찬에서도 사용되면서 ‘대통령의 와인’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격식 있는 자리에는 구대륙 와인이 제격이라는 편견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신대륙 와인의 인기 확산으로 와인 애호가들은 ‘와인은 오래 기다려야 제 맛이다’ 등 와인에 대한 정형화된 시각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

와인숍 텐투텐 박 대표는 “이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골라 마시는 다양한 와인 취향이 존중 받는 시대가 됐다”고 말한다.



전세화 기자 cand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