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주 익숙한 맛에 소비자 갈아타기… 반주의 매력

자칭 트렌드 세터인 K씨(32). 신년모임을 어디에서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회사 상사에게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장소는 제가 정할게요.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데를 알거든요” 그녀가 향한 곳은 대한민국 트렌드의 바로미터인 가로수길. 그런데 어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업 중이던 와인 바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웬 사케 바가?

왜 사케인가? 엔화도 잔뜩 오른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술 시장의 판도를 조금만 지켜 보고 있으면 답은 금방 나온다. 소주 회사들은 앞 다투어 도수를 낮춘 부드러운 술을 내놓고 한쪽에서는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천천히 음미하는 중이다. 한 마디로 ‘좋은 술’이 대세다.

■ 사케는 따끈한 술? No!

실제로 일반 주점이 사케 바로 업종을 변경하거나 메뉴의 한 섹션을 사케에 할애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변화가 변두리가 아닌 강남 등지의 중심가로부터 진행되고 있다는 것.

사케라고 하면 소위 정종으로 대표되는, 겨울에 마시는 따끈한 술로 알려져 왔다. 가격도 가끔 소주 대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부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문을 여는 곳을 보면 ‘사케는 덥힌 술’이라고 생각할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향이 날아갈세라 차갑게 보관한 비싼 사케들이 직접 만든 오뎅이나 제철 사시미와 함께 서브된다. 그 중 일부는 와인의 소믈리에와 비슷한 개념의 사케 전문가 ‘기키자케시’를 두고 손님들이 입맛에 맞는 사케를 고르도록 돕기도 한다.

이쯤 되면 짐작할 만하다. ‘몸에 좋은 술’의 대표 주자 격이던 와인이 그 자리의 일부를 사케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사케는 쿠보타 센조와 핫가이산으로 병당 7만~8만원 정도입니다. 병이 크기는 하지만 소주에 비하면 훨씬 비싼 술이죠. 지금 사케 바 고객들은 소주 마시던 사람들이 아니에요. 와인 소비자들이 사케로 갈아탄 겁니다. 와인과는 가격 차이가 1~2만원 정도니까요”

사케 바 오가노 주방을 운영하는 이용진 대표의 말이다.

“쌀로 만들어 입에 딱 맞아요”

와인에서 사케로 옮겨온 사람들 중에는 트렌드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지만, 와인이 입에 안 맞았던 사람들도 다수를 차지한다. 주변에서 좋은 술이라고 하니 군말 없이 마시기는 했는데 사실은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한 사람들이 사케 열풍이 불고 나서야 입을 연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다.

“와인은 남들이 맛있다, 맛있다 하는데 사실 잘 모르겠더라구요. 안주를 푸짐하게 먹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연거푸 마시는 술이 아니라 한 잔 따라놓고 오래오래 음미해야 하는데 영 몸에 익지를 않았어요. 사케는 일단 곡주니까 맛도 낯설지 않고 주도에 특별한 제약이 없어서 마음이 편해요”

무릇 열풍이 불 때는 항상 쭉정이를 조심해야 하는 법. 일부 이자까야는 바깥에 홍등만 달랑 매달아 놓고 주머니가 가벼운 소비자들에게 싼 값에 사케를 마실 수 있다고 유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술들 중에는 쌀이 전혀 함유되지 않고 향만 비슷하게 낸 합성주들도 있어, 잘못 마시면 다음 날 지독한 두통에 시달릴 수 있다.

“저가의 이자까야에서 판매하는 값싼 사케는 일본 대기업들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 낸 저질 술입니다. 그 사케만 마셔보고 머리 아픈 술이라든지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까 봐 우려됩니다. 많은 종류의 사케를 들여놓은 곳에 가서 다양하게 마셔봐야 진짜 사케의 맛을 알 수 있죠” 라고 사케 수입회사 니혼슈 코리아의 양병석 대표는 말한다.

1,2-사케 열풍속에 함께 주목받고 있는 일본 소주. 미국에서는 우롱차에 섞어 빨대로 마신다.

■ 음식과 먹어야 제 맛

겉 모습만 일본 풍으로 꾸며 놓은 곳을 피해 제대로 사케를 즐기고 싶다면 그 집의 음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빠르다. 칵테일이나 와인처럼 단독으로 마시는 술과 달리 사케는 음식과 긴밀하게 유기작용을 일으키는 반주의 개념이 강하다.

그러므로 음식을 대충 내놓는 곳이라면 주인장의 사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보면 된다. 사케는 해산물과 특히 잘 어울리는데 회나 오뎅, 젓갈, 생선 구이 등과 함께 곁들여 마시면 그 매력을 배로 느낄 수 있다.

와인이 처음 들어왔을 때 ‘샤또’나 ‘무똥’ 같은 단어가 두통을 유발했듯이 사케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준마이’니 ‘다이긴조’니 하는 생소한 단어들의 바리케이트를 넘어야 한다. 쌀의 도정율에 따라 급을 매기고 있지만 이것 저것 생각하기 귀찮다면 한 가지만 기억하자.

깨끗한 맛을 원한다면 준마이, 향긋한 맛이 좋으면 긴조, 술은 취하는 게 맛이라고 생각한다면 혼조조, 모든 맛을 느끼고 싶다면 준마이 다이긴조를 택하면 된다. 일단 자기 취향을 파악하고 그 후에 지역 별로 다른 맛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늦지 않다.

◇ 재미있는 사케 이야기

일본인들은 사케를 마시기 전에 맥주로 워밍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에 앉자마자 급하게 탁자를 ‘탕탕’ 치는데 이는 사케든 음식이든 나중에 준비하고 일단 맥주 먼저 달라는 의미다. 탁자를 치는 경우가 또 하나 있는데 요리사가 목잔 안에 든 사케 잔에 사케를 따라줄 때이다. 사케를 따르다가 넘치면 목잔 안에 고이는데, 멈추지 말고 계속 부어서 목잔 안에까지 사케를 따라달라는 의미다. 잔 단위로 술을 파는 일본에서는 일종의 덤이라고나 할까?

도움말

니혼슈코리아 대표 양병석

오가노주방 대표 이용진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