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쓰는 '사랑과 전쟁']

분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감정반응으로,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분노를 경험한다. 대인관계에서의 분노반응은 소리를 치거나 물건을 부수고 직접직인 폭력을 써서라도 상대를 강압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흔히 나타나지만, 정반대의 태도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반대 경우를 '수동-공격형 passive-aggressive 분노' 또는 '소극적 분노'라고 하는데, 소극적이라 하여 그 피해가 '적극적 분노'보다 결코 적지 않고 때로는 오히려 더 심각하기도 하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움직이지만 그 주변을 온통 태워버리는 용암으로 비유할 수 있다.

한 부인은 결혼과정에서 혼수문제 등으로 남편과 시어머니에게서 인격적인 모멸을 받았다. 부인은 결혼 후에도 시댁 식구와 남편에게서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를 느꼈지만, '친정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지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 대한 남편과 시부모님의 태도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부인은 몸 여기저기가 불편하다면서 병원 출입이 잦아졌고 병을 이유로 부부 성관계를 회피하고 시댁행사에 빠지는 횟수가 늘어났다. 남편이 강하게 요구하면 시댁에 가지는 하지만 돌연히 쓰러지거나 음식접시를 쏟거나 하여 모두에게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때로는 남편이 맡겨둔 돈을 잃어버리거나 사업상 중요한 전화를 전해줄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응급실 당직의사에게서 부인의 정신과 진료를 권유 받은 남편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해 했다.

남편은 물론 부인까지도 가정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으나, 면담 및 검사를 통해서 결혼 전후에 부인이 겪었지만 해결되지 않은 모멸감과 분노가 원인임이 밝혀졌다.

부인 자신은 이미 지난 일이므로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적절히 해결되지 않은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복수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체적 장애를 일으켜 남편과 시댁 식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소극적 분노'는 눈에 띄는 폭력을 쓰지 않고도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에도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겨서 겉으로는 거짓된 평화를 지속한다.

이들은 회피와 방어적 자세, 그리고 침묵을 이용하여 상대의 기대를 좌절시킨다. 때로는 빈정대는 말투로 은근하게 상대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기 자신도 상황에 의한 희생자인 것 같은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더라도 사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인 예측과 자기합리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건전하게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여 결과적으로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이런 태도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심각해지기 쉽다.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실망시키는 상황에서 상대의 잘못에만 주목하기보다 우리 자신이 해야 할 것에 집중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살다 보면 화나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므로,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매이기 보다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해야 한다.

화나는 상황에서는 갈등을 회피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과연 무엇이 자신을 화나게 하는지를 찾아내고, 또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를 배워야 한다. 건강한 분노표현은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면서 상대와의 관계 개선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박수룡 부부치료클리닉 원장 백상신경정신과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