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쓰는 '사랑과 전쟁'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표현이 있다. 자녀가 장성하여 떠나간 후 혼자서 집을 지키는 중년의 가정주부가 허전함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 빠지게 되는 정서적 위기 상황을 말한다.

40~50대의 중년 부부들은 서로에 대해 새삼스레 관심을 가질 것도 없고, 자녀들은 입시에 여념이 없거나 이미 대학을 들어가 자신들 나름대로의 생활에 바빠 대화는커녕 얼굴보기도 힘들다. 실제로 많은 중년 남녀가 권태와 초조, 불안과 우울로 나타나는 ‘갱년기 우울증’의 증상을 하나 둘 정도는 견디면서 살고 있다.

중년 남성은 직장에서 중견 간부직에 있더라도 조기 퇴출에 대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다. 심각하게 직장을 옮길 것을 고려하거나 창업을 꿈꾸며 가슴을 두근거리지만, 그나마 퇴직금을 송두리째 날린 선배의 근황을 들으면 다시 간이 오그라든다. 신체적으로도 예전과 달리 금방 숨이 차고 가끔 가슴이 조이거나 어지러움을 경험하면 말로만 듣던 ‘돌연사’가 바로 곁에 있음을 깨닫는다.

지금이라도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려 생각도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길에서 젊은 남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이제 절대로 저런 시절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자기연민에 빠진다. 동창들과의 만남에서 위로를 찾으려 해도 경제적 위기에 몰린 옛 친구의 소식에 가슴을 졸이고, 그나마 잘 나가는 친구가 한 턱 내어 공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이지만 마음이 가벼울 리 없다.

집에 돌아와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도 없고, 자는 둥 마는 둥 부스스한 부인의 참견이 짜증스러워 이제 대꾸도 하기 싫다. 이런 것이 우울증인가 생각하면서도 내일 아침이면 또 출근을 해야겠기에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쓰러져 잠드는 매일이 반복된다.

중년의 부인은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남편이 직업적으로 불안정하면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걱정이고, 다행히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에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이 싹튼다. 그 동안은 자녀의 성적 향상과 대학 입시에 온갖 정성을 바치며 자녀들의 성공으로 자신의 보람을 삼아왔지만, 잠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녀들의 앞날에 대한 준비일 뿐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투자한 것이 없음을 갑자기 깨닫는다.

그런데다 이제 장성한 자녀는 그런 어머니의 간섭을 노골적으로 귀찮아 하니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허무하다. 나름대로는 성적 매력에 자신이 있던 여성도 중년이 되면 늘어나는 흰머리와 주름을 감추려 애쓰면서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을 잃어간다. 주부들의 모임에 나가보면 자기네 돈 많다거나 자식 잘 나간다는 자랑을 늘어놓는 부인들 때문에 기분이 잡친다.

남편이 자신을 여자로 여기지 않은 지는 이미 오래되어 잠자리에서도 더 이상 성적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일탈에 대한 모의를 하며 묘한 흥분을 맛 보지만, 돌아서 보면 자신과는 머나먼 이야기들일 뿐이다.

사춘기를 ‘제2의 탄생’이라고 하듯이 심리학적으로 보면 중년은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길을 되짚어 보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재정립해야 하는 시기다. 중년의 남녀에게 흔히 나타나는 ‘건강염려증’은 그 동안 바깥 생활에만 쏟았던 관심을 자기 자신의 삶으로 되돌리려는 심리학적 작용으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이들이 잘못 살아 왔다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그 동안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 잘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 동안 소홀했던 다른 점들에 대해서도 보충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특히 예전과 달리 평균수명이 90세에 도달하게 되는 현대의 중년 남녀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기회와 도전을 함께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우선 자녀의 봉양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로 보면 경제적인 노후대책을 세워야 하고,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보면 중년의 부부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점검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할 시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개인의 삶과 가정 생활에서 개선할 점을 찾아 함께 노력하는 중년 부부들은 젊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함께 노후에 이르기까지 남은 여행을 즐겁게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박수룡 백상신경정신과의원 원장 sooryong@medimai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