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과 의사가 쓰는 '사랑과 전쟁'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의식적인 선별과정을 통하여 상대를 선택하였다고 믿지만, 심층심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자신도 잘 모르는 무의식적 과정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을 예술작품에서는 흔히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 '한 번은 만나야 했을 것 같은 사람', '순간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 '벗어날 수 없는 매력' 등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남녀가 서로에게 빠져들게 만드는 심리현상을 C. G. Jung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아니마는 남자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여성상으로, 현실의 어머니를 통해서 영향을 받지만 남자의 본능처럼 여성에 대한 일반적 태도를 결정하게 한다. 남자의 아니마는 그 남자의 인격 발달에 따라서 변해가는데, 어려서는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띠었다가 성년이 되면 성적 충동으로 나타나고, 더러는 남자를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요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니무스는 여자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이다. 아니무스도 여러 발달단계를 취하는데, 원시적인 아니무스는 육체적인 힘을 자랑하는 남성상으로 나타나고, 그 인격이 발달될수록 소녀를 여성을 성숙하게 하는 정신적 지도자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각각 큰 역할을 한다. 즉 남녀는 상대에게 자신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 상을 투영하여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어떤 남자는 의식주 등 기본생활의 해결을 위해서 부인을 필요로 하고, 어떤 남자는 성욕의 해결을 위해서 여성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으로 여기는데, 이것은 그 남자의 아니마가 그 수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반면 소녀들이 흔히 뛰어난 스포츠맨이나 잘 생긴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녀의 아니무스가 아직 발달 초기에 있기 때문이다. 소녀들의 아니무스는 발달되어가면서 주변의 남자에 대한 연모로 변하여 나타난다. 많은 여자들은 자신의 사랑하는 남자가 경제력뿐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도 자신을 잘 이끌어주기를 바라는데, 이는 여자들은 존경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더 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게 되고 요구하는 것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도 기쁨을 얻는다. 하지만 상대가 기대하는 것이 자신의 본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상대가 억지로 입히려는 것 같은 불편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상태가 반복되면 헤어질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과정이나 결별을 통하여 깊은 상실감을 얻게 된다. 이 충격은 흔히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이나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 표현될 정도로 커서, 죽음을 선택하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다시 되찾고 싶어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은 이처럼 힘든 과정이 자신을 발견하고 보다 성숙한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실연의 고통을 견뎌내고 인격의 발달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상대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상대를 통하여 안정을 바랐던 사람이라면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새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또 이성과의 관계에서 성욕의 해소만을 추구했던 사람에게는 보다 건전한 이성관계를 배우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가 된다.

멋있는 애인을 통하여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 했다면 자기 스스로가 멋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누군가가 자신을 잘 이끌어주기를 바랐다면 자기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사랑이 주는 고통을 잘 이겨낸 사람만이 자신의 정신 세계를 조금 더 깨닫게 되고 또 현실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더 잘 완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성숙한 사랑을 할 기회를 얻는다.



박수룡 백상신경정신과의원 부부치료클리닉 원장 sooryong@medimai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