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길티 플레저남이 알까 두려운 나만의 저속하고 부끄러운 취미들

이제 그만, 그만...

아는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손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후두둑 떨어져 나가는 억겹의 비늘, 마음의 시름, 스트레스의 지층들.

"이미 많이 손상되었습니다. 이제 한 번만 더 하시면 회복 불가입니다"

의사의 조언은 어느 새 귓등으로 날려 버리고 오늘도 때수건을 낀 손에 한껏 힘을 주고 빡빡, 신명나게 때를 민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오토튠 프로그램 화면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즐거워서 계속 하게 되는 것. 죄책감은 실제로 비도덕적 행위보다는 자신의 저속하고 부끄러운 취미를 남이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감정을 말한다.

패션, 음악, 음식(특히 고칼로리의 달고 기름진)에서의 취향이 주로 길티 플레저와 관련된다. 세상이 바뀌면서 길티 플레저도 변했다. 손자에게 독약이라고 속이며 몰래 꿀단지를 감춰 놓고 먹던 할아버지에서 방문을 닫고 아이돌의 복근과 허벅지에 하악대는 30~40대들로. 21세기 형 길티 플레저는 무엇일까?

오토튠

오토튠은 죄악인가. 본래의 목소리를 왜곡한다는 의미에서 오토튠은 사기다. 한 대중음악웹진은 오토튠을 놓고 "똑 같은 모양의 감흥 없이 팔랑거리는 음악"이자 "거부하고픈 독감, 쾌락을 좇는 설레발"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의 기술일 뿐 잘잘못을 따질 수 없는 분야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건 선악 논란이 아니라 한국에서 오토튠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미인도 언제부터 미인이었느냐가 중요한 이 나라에서 기술을 벗겨냈을 때의 맨 목소리는 항상 중요한 사안이다.

SBS '강심장'
아이돌 가수들의 라이브 영상에서 반주를 떼어내고 목소리 파일만을 업로드 해 '우리 오빠들'의 실력을 증명하려는 10대 팬들과 후크송, 표절 옆에 오토튠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놓으며 요새 대중 가요를 비판하는 기사, 그리고 한국 가요계의 본좌는 박효신과 김범수, 임재범뿐이라는 대중의 흔들림 없는 믿음에서 우리가 얼마나 가창력이라는 전통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족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이를 완전히 배신하는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오토튠으로 떡칠했다는 비난을 받는 노래들이 각종 차트 1위를 돌아가며 차지하고 있는 것. 여유롭게 고음을 소화하는 김범수도, 감성에 푹 젖은 박효신도, 심지어 존재의 근원을 고민하게 만드는 김광석의 목소리도 다 피곤해지면 우리는 오토튠의 매력적인 전자음에 빠져 든다.

아이돌

'일코'라는 단어가 있다. 일반인 코스프레의 줄임말로서 코스프레는 또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의 일본식 줄임말이다. 일코는 한 마디로 일반인 흉내다.

일반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당신이 은밀히 빠져 있는 세계의 주인공은 바로 아이돌이다. 그걸 왜 숨기냐고? 나는 클래식과 재즈를 들으며 고상하게 나이 들고 싶은 30대니까.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
"주말 내내 세수도 안 하고 나초칩 한 봉지 그 자리에서 다 먹으면서 태민이 웃는 것만 봤어."

'태민이'는 조카 이름이 아니고 샤이니란 그룹의 막내 멤버다. 낙엽만 굴러가도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 아이의 나이는 18세. 누나팬, 아니 이모팬들은 그 미소에 '우쭈쭈' 거리다가도 하루가 다르게 자르는 아이의 팔뚝에 남몰래 '하악'댄다.

걸 그룹으로 넘어가면 팬 연령층은 50대까지 넓어진다. 여동생 같아 좋고 조카 같아 예쁘다지만 정작 눈길이 머무는 곳은 핫팬츠로 시원하게 드러낸 허벅지 인근이다. 가끔 그들의 덜 다듬어진 가창력과 유머 감각은 노련한 사회인인 삼촌, 이모 팬들의 짜증을 유발하며 이승철의 노래나 조형기의 입담을 그리워하게도 만들지만, 싱싱한 젊음 하나만으로 곧 용서가 된다.

적어도 그들을 보는 동안에는 숨쉬는 것 외에는 따로 요구되는 것이 없지 않은가. 영화에 숨겨진 복선을 해석하는 것조차 귀찮을 때, 혹시나 미래의 배우자를 만날 수도 있는 선 자리 조차 번거롭게 느껴질 때, 그밖에 조금이라도 고차원적인 모든 행위가 싫어질 때,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기꺼이 아메바가 되어 주말을 아이돌에게 헌납한다.

관음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했던 <커플 브레이킹>은 케이블 최초로 시즌 6까지 제작되는 기록을 세웠다. 굳이 찾아보는 사람은 소수였지만 미친 듯이 채널을 돌리는 그 찰나의 순간을 잡아채는 능력이 그 프로그램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둥이에 주사까지 심한 남자 친구에게 가짜 '작업녀'를 투입해 애정도를 시험한다는 내용의 이 프로그램은 남자와 작업녀의 진한 스킨십, 여자의 눈물과 분노, 두 사람의 갈등, 화해라는 공식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뻔하고 자극적인 영상에 시선을 빼앗기는 데에는 남녀노소가 없었고 지위고하가 없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훔쳐보기도 전에 먼저 폭로한다. 프리랜서 기자 이여영은 패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입담 경쟁이 사생활 폭로로 이어지는 것을 예능 프로의 주요 흐름으로 보았다. SBS <강심장>은 요즘 미친 듯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폭로 경쟁의 막장이다.

출연자들은 앞다투어 논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가지고 나오고 사회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지, 또는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지를 강조한다. 얼결에 분위기에 압도돼 보고 말지만 끝나고 나면 별 것도 아닌 가십쇼에 관중으로 동원됐다는 사실에 허탈해진다.

뻔한 최루성 멜로 영화를 보고 결국에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을 때처럼 분하고 원통하달까. 그러나 그러면 뭐하나. 어느 새 또 리모콘을 멈추고 있는 것을. "뭐? 같은 드라마 출연한 사람이랑 사귀었었다고?"

길티 플레저는 타인이 기대하는 내 모습과 나의 기호가 충돌하는 현상이다. 충돌의 강도는 천양각색이다. <뷰티풀 마인드>를 최고의 영화로 삼고 싶지만 사실 나의 잊을 수 없는 영화는 <브링 잇 온>이라면 충돌의 강도는 비교적 미약한 편이다. <데미안>을 읽어야 하는데 <드래곤 볼>이 보고 싶다면 대형 사고 수준이다.

길티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와 달리 요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괴취미를 공개하는 데 그다지 거리낌이 없다. 싸구려 인스턴트 음식에 끌리고 걸 그룹에 열광하는 것은 딱히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꼭 숨기고 은폐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길티 플레저라는 말은 사회적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개인의 다양한 취미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하나의 놀이이자 문화로 의미가 변용되었다. 아이돌이나 폭로 경쟁이나 어째 전부 말초적이기만한 놀이 문화 아니냐고? 그렇다.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는 현대인들은 느낄 수 있는 기쁨이 하나씩 줄어갈수록 음식이나 TV처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극적인 즐거움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꼭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아니다. 일본의 거대한 애니메이션 산업의 바탕은 오타쿠들의 길티 플레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도움말: 심리 칼럼니스트 강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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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