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쓰는 '사랑과 전쟁'

드라마 '민들레 가족'
우리나라의 영화나 드라마에 흔히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에는 몇 가지 전형이 있다.

즉 가족들과 애정표현이나 대화가 거의 없이 자신의 직업에만 몰두하며 가정 내의 많은 일들은 부인에게 맡겨두고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부인과 자녀들에게 호통을 친다.

그런데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의 큰소리는 그나마 효과가 있어서, 자신이 실질적인 가장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경제력이 약한 아버지의 말은 가족들에 대한 영향력이 미비하여 '자기 일도 잘 못하는 사람'의 말이나 '세상물정 모르는 이야기'로 취급당한다. 심지어 아버지의 모습이 돈은 벌지 않으면서 술이나 도박에 빠져 툭하면 가족에게 폭력을 일삼는 '인격 파탄자'로 그려지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드라마 <민들레 가족>의 아버지는 오랜 직장생활 동안 해외근무와 지방출장 등으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는 회사의 발전을 자신의 성공으로 믿으며 집의 식구들 보다 회사 동료와 부하 직원들을 더 가까운 가족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결국 진급에서 누락되어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회사에서는 그 동안 기울였던 자신의 노력이 이미 '한 물' 간 것으로 취급을 받고, 집에서는 벌써 결혼한 딸들 덕분에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집안에서나마 기죽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느 자리, 어느 역할을 맡아야 할지 어리둥절하고, 밥솥 같은 전자제품도 어떻게 쓸지 모른다. 그나마 아직도 자신을 태산처럼 의지하는 부인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어떤 친구들은 퇴직 후 집에서 '말라붙은 밥풀' 취급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국가적 발전을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우리 아버지들이 왜 가정에서는 이처럼 '부적응자' 취급을 받게 되었을까?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세상 쓴맛을 모르는 아내와 자녀들이 배은망덕해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고, 전쟁과 파산의 위험에서 벗어나 사회가 안정되고 보니 이제는 '방패막이'가 필요 없어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직업기술을 배웠던 것처럼, 가족과 사이 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앞으로 '좋은 아빠 기술'을 일부러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남녀를 막론하고 사람의 심성에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공존하는데, 의식에서 남성적 요소를 강조할수록 여성적 요소는 무의식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처럼 여성적 요소가 무의식에만 머물러 있는 남성일수록 가정생활에 중요한 대화와 감정표현에 서투르게 된다.

그런데 여성적 요소를 심하게 억압하는 남성은 오히려 그 부작용으로 자기도 모르게 '여성화'되어 갈 수 있다. 그래서 감정의 변덕이 심하여 쉽게 삐치거나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풀어지지 않거나 까닭 모를 감상에 빠져든다. 더러는 술이나 향락에 의존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여성과의 불륜에 빠져서 그때까지 쌓아온 명성을 허물어뜨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남성도 자신의 인격에 숨어있는 여성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계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간단한 방법으로는 가족과의 공동시간을 가지면서 부인이나 자녀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의 감정변화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다.

드라마의 그 아버지는 직장에서의 지위를 잃은 대신 이제는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 남편, 그리고 아버지라는 역할을 새로 익혀야 하는 인생의 전환기에 있다. 그런데 그 역할은 실직자가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자신이 소홀히 했던 인격의 완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또 이것은 남성들이 가정을 자신이 군림할 수 있는 곳으로 여기지 말고 성실히 돌보아야 하는 성소(聖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수룡 편한마음 정신과의원 원장 sooryong@medimai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