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판타지 전루이비통, 디올… 패션 바라보는 5人의 새로운 시선

양문기
패션과 미술은 상극일까? 이론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 국내에서 이 둘의 소통은 그다지 원활하지 않은 것 같다. 갤러리에서 고가의 작품을 사가는 이들의 패션은 좋게 말해 수수하고, 패션 기업과 아티스트 간의 콜라보레이션도 거의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의 작가들이 패션을 말하는 방법에 이르면 갈등은 극에 달한다. 소비 조장, 사치, 천박한 욕망, 성적 유혹 등 열에 아홉은 패션의 역기능에 주목하고 혀를 차는 교훈적 작품이었다.

그러나 미디어를 등에 업은 패션이 하루가 다르게 삶의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어 오면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조금 더 다양해지고 너그러워졌다.

5명의 작가가 패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에는 패션을 향유하는 이도 있고, 패션을 두려워하는 이도 있으며, 그저 강 건너 불처럼 막연한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는 이도 있다

백종기
돌에 새겨진 샤넬 -

미친 듯이 짐을 쌌다. 하지만 떠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에게 가방은 돌이었다. 돌처럼 무거웠다. 의 '돌 가방' 작업은 5년 전부터 시작됐다. 놓인 곳과 든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돌도 됐다가 깃털도 됐다가 하는 가방은 그로부터 작가의 영원한 오브제가 되었다.

먼저 가방을 만들 돌을 찾아 다녔다. 산에서 무 자르듯이 잘라내는 돌은 죽은 돌이라 싫었다. 금도 안 가고 크기도 적당한 자연석 2개를 찾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나마도 잘라 보면 둘 중 하나는 안에 흠이 있어서 버려야 했다.

몇 날에 걸쳐 반질반질하게 광을 내다 보면 돌은 그가 가진 본래의 색을 드러냈다. 사람의 유전자처럼 천양각색으로 자기 빛을 발하게 되면 마크를 찍는다. 코코 샤넬의 앞 글자인 CC를 교차시켜 만든 샤넬 로고, 명랑 만화의 특수효과처럼 발랄한 듯 고루한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은 풍파를 겪으며 명품으로 거듭난 패션 하우스들의 로고는, 사실 가죽이나 패브릭보다 돌에 새겨졌을 때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은 찍어 놓고 나면 알 수 있다. 그렇게 돌로 만들어진 '명품 가방'은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에 손잡이까지 달렸지만 영원히 꿈쩍도 하지 않을 것처럼 묵직한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박영숙
Brand new heroes -

젊은 날, 당신의 영웅은 누구인가? 아버지? 레드 재플린? 주윤발?

추상화 작업을 계속해오던 작가는 어느 날 사람들이 알아먹지도 못할 어려운 미술이 싫어졌다. 깨끗하게 때려 치운 뒤 그가 집어 든 것은 태권 브이였다.

"나와 동시대를 산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추억. 어린 시절 나의 영웅은 두말할 것 없이 태권 브이와 아톰이었다."

작가는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 친구 태권 브이의 얼굴을 루이비통 로고로 도배했다. 아톰의 머리와 주먹에도 마찬가지다. 바뀐 세상의 새로운 권력자는 '싸모님'들의 한 팔에 들린, 자동차 한대 값과 맞먹는다는 명품 백이 아닌가.

최혜경
구세대 영웅들의 얼굴과 팔, 다리에 새로운 세대의 권력을 발라 놓자 그들은 비로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브랜드-뉴 슈퍼 히어로'로 거듭났다. 딱히 루이비통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작가의 머리 속 전형적 명품 이미지를 구현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브랜드의 눈치를 본 약간 다른 버전이다.

발이 부러지더라도 갖고 싶어? -

옛 중국에서는 발이 반으로 줄어들면 시집을 잘 갔고 동화 속에서는 발가락을 잘라내서라도 유리 구두에 끼워 맞추면 왕자를 가질 수 있었다. 요즘에는? 최대한 적은 면적으로 지면을 디딜 수 있다면! 관능미와 자신감을 떨치고자 하는 여성들은 발가락이 기형이 되는 위험을 감수해가며 스스로를 높은 굽에 올려 놓고 있다.

작가는 힐을 신은 여성의 발을 그리지 않는다. 거대한 캔버스의 정중앙에 놓인 하이힐은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덩그러니 홀로 주인공이다. 현란하고 고혹적인 배경 속에서 무시무시한 빨간색으로 채색된 신발은 그 자체로 캔버스를 꽉 채워 굳이 신어줄 이가 필요 없어 보인다.

일반적 상식을 뛰어 넘는 높은 굽은, 신체를 왜곡시켜 아름다움을 얻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을 우뚝 세우고자 하는 요즘 여성들의 욕망을 투사한다. 말이 안 되는 높이일수록 그들의 욕망도 상식을 벗어난다. 결국에는 뼈를 깎아서라도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는 광기 어린 외침은 고고하게 놓인 하이힐 한 켤레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한 명의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

전상옥
나를 감출 테니 너를 보여줘 -

옷이 보온과 가림의 기능을 벗어나고부터 사람은 소비가 주는 아찔한 쾌락과 양심의 가책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작했다. 향수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치로웠다. 생필품도 아닌 주제에, '칙'하고 뿌리고 나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존재이면서 보석 같은 용기 속에서 찰랑거리며 사람들을 유혹했다.

작가는 안나수이와 디오르의 향수를 그리며 최대한 물감을 얇게 펴 발랐다. 붓 자국이 느껴지지 않도록, 숨 소리, 땀 냄새… 인간이 뿜어내는 모든 악취와 어설픈 손길이 남긴 모든 흔적이 지워지도록, 매끈하고 인공적인 것만 남을 때까지 여러 번 겹쳐 칠했다. 모공은 부도덕이고 뻐드렁니는 죄악이니까.

그 결과 샛별 같은 눈에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완벽한 인형이 탄생했지만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다시 빙 돌아 타인의 동물 같은 본능을 자극하는 일이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소비 문화에서 완벽히 발을 뺄 수 없다면, 아니 사실 견딜 수 없이 즐겁다면, 그것을 받아 들이고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은 어떨까? 패션과 사랑에 빠진 작가는 행복을 주겠다고 유혹하는 그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고 적의 화법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를 가르쳐 준다.

내 그림을 찾아보세요 -

완벽한 보호색. 갤러리에 걸어 놓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그림이지만 백화점에 들어가는 순간 낙엽 속 누에나방처럼 완전히 숨어 버린다. 패션 잡지에 실린 광고 사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그림은 실제로 백화점 내에서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는 패션 매장에서 내건 사진으로 착각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광고 이미지는 옷과 모델, 조명이 한데 만나 소비 욕구를 은근하게, 그러나 극한까지 끌어 올리는 자본주의의 예술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가치 판단을 보류하고, 21세기 문화의 핵심 장면임을 인정하며 기꺼이 그 매력에 주목한다.

바스락 소리가 날 만큼 실감나는 새틴 드레스와 살갗이 비치는 시스루 블라우스를 확대해서 그리는 것을 통해 작가는 당시 그 광고를 보고 느낀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까지 확대시켜 박제해 놓았다. 한 달이면 버려지는 잡지의 지면을 벗어나 액자 속으로 들어간 그들에게 영원성이 부여된 것은 물론이다.

4월30일까지. 롯데 에비뉴엘 지하 1층부터 5층까지.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