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 걸리는 네덜란드식 추출법의 깊은 맛과 향, 새 트렌드로 주목

투명한 유리병에서 출발해 기나긴 밸브를 통과하길 장장 12시간.

가루로 분쇄된 뒤 다시 강한 압력으로 응축된 파우더 단층을 지나 가까스로 탄생한 검은 액체. 그대 이름은 커피, 아니 더치 커피(Dutch Coffee)라고 불린다.

더치 커피는 이름 그대로 네덜란드식 커피. 네덜란드에서 생산된 원두나, 로스팅된 커피라기 보다는 네덜란드식 추출법을 사용한 커피를 뜻한다.

국내에서도 간간이 소개돼 오다 최근 더치 커피 전문점도 생겨나고 애호가도 늘면서 커피를 즐기는 새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다.

서울 홍대 주차장 길목에 자리한 카페 미즈모렌. 주문한 더치 커피를 받아들고선 처음에 약간은 당혹스럽다. '냉커피를 시키지 않았는데…' 길다란 유리 글라스에 담긴 블랙 커피가 유난히도 검고 진해 보인다. 그리고 유리창가에 놓여진 '이상한 모양의 기구들'.

더치 커피는 원래 냉커피로 통한다. 일단 커피를 '내릴 때' 예상외로 찬물을 쓰기 때문. 원두 드립커피가 뜨거운 물을, 에스프레소 커피가 뜨거운 증기와 압력을 이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킬 즈음 유리창가의 기구들이 눈에 띈다. 위 유리병에 가득찬 맑은 물, 하지만 맨 아래 유리 글라스에는 '검은 액체'가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진다. '저렇게 조금씩 떨어지도록 만들어놨지? 21세기 스피드 시대에'

더치 커피를 추출하는 기계는 우선 모양이 길다랗다. 먼저 맨 위에 자리한 둥그런 유리병에 물을 채워주면 이 물이 여러 단계의 밸브와 저수 용기를 거쳐 마지막으로 압축된 커피 입자층을 지나 원액이 떨어지는 방식이다.

결론적으로 더치 커피는 중력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한다. 드립 커피에서의 뜨거운 물을 붓는다거나 에스프레소 머신처럼 증기와 압력의 힘을 쏟아 붓지도 않는다. 그리고 사용하는 물도 냉수, 엄밀히는 가열하지 않은 상온수다. 더치 커피용 기구 이름도 '콜드 워터 브루어리(Cold water brewery), 한국말로도 '찬물 추출법'이다. 때문에 더치 커피는 여름 커피로도 통한다.

찬 물을 사용하고 자연의 중력만을 사용해서인지 더치 커피는 커피 원액을 추출하는데 보통 한나절이 걸린다. 대략 평균 12시간. 이 정도면 가히 '기다림의 미학'이라 부를 정도. 추출 기구는 이 밖에도 코르크와 구리 동관, 로드, 융 소재의 필터 등 여러 단계의 장치로 구성돼 있다.

더치 커피 추출 기구에서 실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쇄된 커피 입자층이다. 기구의가장 아래 부분 유리병 안에 두텁게 채워져 있는데 물이 이 부분을 통과하면서 원액이 추출되는 것. 매우 단단하고 밀도가 높게 형성된 커피입자 단층을 통과하며 커피의 향과 맛을 품게 된 원액은 한 방울씩 계속 떨어져 내린다. 더치 커피가 '커피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

오로지 물과 커피 원두만이 만나 오랜 시간 자연의 힘만을 통해 태어나서 그런지 더치 커피는 향이 깊고 진하다. 와인처럼 바디감이 있고 목넘김이 좋다는 얘기도 듣는다. 특히 우유나 물을 타지 않은 더치 커피 스트레이트는 본연의 커피 향과 맛을 가장 잘 살려낸다. 마치 커피 원두를 입 안에서 그대로 씹으면서 원액을 추출해 내는 느낌.

특이하게도 더치 커피는 와인과 비슷한 습성을 갖는다. 오래 보관할수록 더 맛이 살아 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냉장고에서 숙성도 시킨다. 냉장고에는 유리병에 담긴 더치 커피들이 들어 차 있고 병 마다 커피 제조일자가 빈티지처럼 적혀 있다.

더치 커피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대항해 시대 네덜란드 사람들이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 재배한 커피를 배로 실어 나르다 원두에 물이 스며들었는데 맛을 보니 괜찮아서 계속 마시게 됐다는 것은 조금은 전설 같은 얘기. 구체적으로는 배에 뜨거운 커피를 만들어 싣게 되면 쉽게 상하기 때문에 아예 찬물로 커피를 내려 실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면 커피 맛에 변화가 적고 부드럽다는 주장.

벌써 더치 커피 애호가들 중에는 문화계 인사들이 많다. 유영구 KBO 총재나 강용석 국회의원, 박기태 연세대 교수를 비롯, 인디밴드 노브레인, 가수 구준엽, 심태윤 등이 이미 알려진 더치 커피 애호가들. 특히 숙성시킨 더치 커피를 즐기는 이로는 사진작가 강영호씨가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숙성된 더치 커피를 여러 병씩 사가곤 한다.

더치 커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는서울 청담동의 클럽 '맨션'에서도 더치 커피를 전문적으로 제공하고 중계동의 다방 아지트, 강남의 커피미학 등도 더치 커피 명소들.

하지만 더치 커피 '생산량'에는 한계가 있다. 보통 기구 1대에서 12시간 동안 추출되는 원액량은 2000~3000cc. 국내에서 가장 많은 8대를 가진 미즈모렌 조차 하루 1만8000cc밖에 되지 않는다. 여름에는 밤낮 가동해 겨우 3만cc를 넘기는 수준. 어쨌든 '떨어지기 전에 어서 더치 커피 맛을 보러 가볼까!'.



글·사진=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