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스라사이트' 죽었던 건물 카페 & 갤러리로 탈바꿈 시켜

앤스라사이트 외관
그냥 보기에도 공장이나 창고 같기만 하다. 또 건물은 머잖아 허물어질 것처럼도 보인다. 오래 돼서 낡아 볼품 없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곳을 문화공간이라고들 한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당인리 발전소 인근. 고층 아파트들이 사방으로 우뚝 솟아 있는 주택가 한 가운데 2층짜리 허름한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그런데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건물 외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젊고 패셔너블한 이들이 많이 보인다.

이 건물은 지금 카페와 갤러리로 쓰인다. 정식 이름은 앤스라사이트(Anthracite), 무연탄이라는 뜻이다. 바로 옆 당인리 화력발전소에서 예전에 당인리선을 따라 화차로 실어 나르던 무연탄을 생각해 붙였다. 좀 더 듣기 좋은 다른 별칭은 '당인리 커피공장'. 카페지만 커피를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로스팅까지 직접 해서다.

올 초까지만 해도 이 건물은 창고와 공장으로만 쓰였다. 한때 파친코 기계를 만들기도 했고 이후 오랜 기간 신발 제조 공장이었다. 하지만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겨가면서 창고로 용도변경됐고 최근에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그냥 텅 비어 있었다.

죽었던 건물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은 불과 두어 달 전. 낡고 텅 빈 창고를 개조해 카페와 갤러리, 커피 로스팅 기계까지 들어선 번듯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2층은 카페와 테라스, 1층은 갤러리와 커피 로스팅 공간. 사실 여전히 창고 콘셉트여서 말 그대로 그렇게 번듯하지는 않다.

앤스라사이트 1층 갤러리, 옛 창고 공간 그대로다
앤스라사이트라는 간판도 구석에 조그맣게 붙어 있어 처음 보는 사람 누구도 이 곳을 문화공간이라고 생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저런 초라한 빌딩에 세련돼 보이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자주 들락거리지?"라고 생각하기 십상. 하지만 '창고&공장 갤러리'라는 문화의 새 장르를 앞장서 열어 나가고 있다.

이 곳을 먼저 '점령'한 이들은 디자이너 분야의 아티스트들이다. 가까운 홍대 근처에 디자인 사무실을 둔 이들이 이 곳을 아지트 삼아 모임을 갖거나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을 즐겨 가지면서부터다. 최근에는 디자이너 수(soo)가 'TNT, 전 세계를 돌며 모든 사람들이 티셔츠로 친구가 되는 티셔츠 문화폭탄'이라는 타이틀로 티셔츠 아트 전시회(www.tntnt.org)도 개최했다.

전시가 열린 공간은 1층 갤러리와 주차장으로도 쓰이는 앞마당, 그리고 2층 카페와 테라스까지. 말이 테라스고 갤러리지, 공간이나 시설 수준은 옛 공장이나 창고 그대로다. 정확히는 창고에서 전시회를 한 것이고 창고를 갤러리로 쓴 셈이다. 그나마 갤러리를 찾은 많은 디자이너들과 아티스트들만이 이 곳이 문화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앤스라사이트를 탄생시킨 이 또한 아티스트다. 김평래씨, 뮤지션 출신으로 재즈밴드에서 더블베이스 연주 활동을 했던 그는 지난해 가을 우연히 이 건물을 발견했다. "완전 폐허였습니다. 바로 옆 아파트를 지을 때 수용될 뻔하다 시기를 넘겼고 임대도 안 되니까, 그냥 버려진 상태였죠." 하지만 김씨는 건물을 보자마자 자신이 찾던 바로 그 것이라고 직감했다.

"음악인 출신이어서 연주를 할 수 있고 또 전시도 가능하고 책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다녔습니다. 우연찮게 지나가다 보게 됐죠. 홍대 쪽은 너무 비싸서 이제 돈 없는 예술가들이 활동하기에 부담스럽거든요."

1910년산 로스팅 기계
1년 넘게 방치되던 건물은 우선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당연히 부동산에도 물건으로 나와 있지 않고 여기저기 수소문해 겨우 건물 주인을 찾아 설득에 나섰다. 처음에는 신경 쓰기 싫다던 건물주도 두 세달 동안의 끈질긴 권유 끝에 결국 동의했다.

그리곤 건물 손보기. 손을 봤다지만 사실 낮은 천장을 뜯어내고 바닥을 새로 다진 공사가 개조의 전부이다. 그나마 허물어진 벽을 일부만 남기고 털어내고 2층 테라스 난간을 설치한 것이 추가 작업. 이 마저도 인부를 쓰지 않고 직접 건축 재료를 사다가 김씨가 친구들과 손수 작업했다.

그래서 가구나 집기를 빼고는 옛 공장과 창고 그대로다. 2층에 물건을 실어 올리던 기중기도 그대로인데 지금도 작동이 된다. 테이블도 남의 집의 뜯겨진 현관문을 사용하고 중고 의자도 천을 입혀 재활용했다.

카페 오픈과 함께 새로 사들인 로스팅 기계 또한 중고 골동품이다. 1910년에 만들어진, 전세계에 단 2대밖에 없는 로스팅 기계라는데 김씨가 미국까지 날아가 직접 사 가져왔다. 현지 커피 박물관에서 1억여 원에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앤스라사이트의 테마는 당인리 화력발전소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정부 발표 방침과도 맞아 떨어진다. 발전소를 이전시킨 후에 발전소 내부 시설은 물론, 인근 지역까지 문화 벨트로 꾸미겠다는 시도와 궤를 같이 한다. 당장 국제여성영화제는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시사회를 이 곳에서 가지기로 했다.

앤스라사이트 2층 카페
하지만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앤스라사이트의 미래도 밝지만은 않다. 이 곳이 재개발 지역이어서 건물이 언제 수용될지 모르는 상태. 더불어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해 밤이면 시끄럽다고 항의하거나 신고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 문화예술인들은 앤스라사이트로 발길을 향한다. 아직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이 50% 이상을 차지하지만 입소문을 듣고 찾아 오는 일반인들은 계속 늘어나기만 한다. 한 번 찾아가 보려면 쉽지 않은데도 그렇다.


기중기가 그대로 놓인 앤스라사이트 2층 테라스

글·사진=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