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투고(to-go)맛, 디자인, 건강 고려한 일본식 도시락 등 고급 포장 음식 인기

분홍색 초생강, 짙은 고동색의 곤약, 연노랑색 계란말이, 선명한 오렌지색 연어알, 푸릇한 연두색 피클까지. 알록달록한 색깔에 옆 테이블의 어린 계집아이가 제 밥은 버려두고 연신 흘깃거린다.

자작하게 깔린 밥 위에 하나 가득 올려진 반찬의 수는 10여 가지. 개수로만 따지면 12첩 반상이 부럽지 않다. 나무 바가지처럼 생긴 둥근 그릇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본식 도시락 벤또를 표방하며 서울 홍익대 근처에 오픈한 코코로 벤또는 '8000원짜리 도시락이 팔릴까?'라는 우려를 깨고 매장 앞에 기나긴 줄을 세우며 지난해 외식 트렌드의 슈퍼 루키로 등극했다.

"월 150만원을 버는 사람도 '마켓오'를 사 먹는 시대에요."

갤러리 나인의 구근나 대표가 올해 프리미엄 버거집 '마더스 오피스'를 열기 전 고려한 것은 '프리미엄 투고(to go)' 식당이었다. 온장고 안에 미리 만든 파스타나 햄버거 스테이크, 라자냐 같은 음식을 넣어두면 손님이 쇼윈도를 보고 선택해서 싸가거나 아니면 커피만 시켜서 그 자리에서 데워 먹도록 하는 것.

2단 벤또 '신칸센'
"가져가서 먹는 음식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존재해요. 하지만 몸에 안 좋거나 대충 만들었다는 인식이 강하죠. 요즘 사람들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으면서 제대로 만든 음식에 충분히 지갑을 열 용의가 있어요."

음식 맛이 변하지 않게 보관하는 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뒤로 미뤘지만 그녀는 곧 이태원이나 청담동 등 일정 소비 수준 이상인 지역에 프리미엄 투고 전문 음식점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끼, 8000원 시대가 열리다

고급 포장 음식은 웰빙에 대한 요구와 소비 증가, 미식 취미, 골드 미스 등 다양한 사회 변화에 영향을 받아 부쩍 늘어났다. 1인당 밥값이 5000원으로 고정돼 있던 시대는 어느새 먼 과거가 돼버렸고 지금은 5000원과 1만원 사이, 약 8000원 선에서 그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맛과 건강, 비주얼만 충족시킨다면 이제 아무도 비싸다고 불평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트렌드를 가장 잘 충족시킨 것이 벤또다. 태생부터 이동을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고, 형형색색의 아티스틱한 모양새가 만족감을 주며, 밥의 여부로 불량 식품과 건강 식품을 가르는 우리의 정서에도 맞다.

일본식 도시락 '코코로 벤또'
"맛 외에 시각적 재미에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지난해 3월 홍익대 근처에 오픈한 코코로 벤또는 외진 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끌어 들여 1년이 조금 넘은 지금 4개 지점으로 늘어났다. 벤또라는 뉴 아이템에 대한 호기심이나 일식에 대한 홍대 지역의 열린 마음 등 인기의 요인은 많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눈이 즐거워서다.

레스토랑 비즈니스 전문가인 김찬혁 공동대표는 맛은 주방에 맡겨 놓고 본인은 밥 위에 올라가는 십 수가지 반찬의 색과 모양을 디자인했다. 색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재료를 썬 모양도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신경 쓴 것. 그가 말한 시각적 재미 중 최고의 효과를 거둔 것은 벤또를 담는 그릇이다.

김 대표는 수천 가지에 이르는 벤또 중 둥근 나무통에 담긴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국내 시장에서 비슷한 것을 찾아내 식탁에 올렸고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벤또 가게들이 이를 우루루 따라 하면서 국내에서는 거의 벤또 전용 용기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고급 포장 음식이 힘든 것은 간단함과 정성스러움이라는 두 가지를 같이 만족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메뉴가 중식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중화요리는 아무래도 센 불에 빠르게 휙휙 볶아낸 것이 제 맛 아닌가. 깨끗하고 건강한 중식을 표방하는 팬더키친은 기름 사용을 현저히 줄이고 주문 즉시 요리를 시작해 5분 안에 용기에 담아 내준다.

홍대 아메리칸 차이니즈 '기린아'
비위생의 대명사격으로 특히 불신이 쌓인 자장면의 경우 아예 식탁 위에 재료와 만드는 과정을 써 붙여 놓았다. 거의 1.5인분에 달하는 잡채밥에는 보란 듯이 큼직한 고기 덩이들이 섞여 있어 부실한 끼니에 대한 걱정을 씻어준다. 테이크 아웃은 물론이고 배달도 가능한데, 거친 철가방과 오토바이 폭주를 지양하며 새로운 중식 문화를 표방하고 있다. 단, 주문은 평일 1시간 전, 주말 2시간 전에 해야 한다.

5분만 기다리세요!

드물게 아메리칸 차이니즈를 맛볼 수 있는 곳도 있다. 홍대 합정역 근처 기린아에서는 미국 시트콤에서 흔히 보던 하얀색 종이 박스 안에 밥과 반찬을 따로 담아 판다. 의사와 대기업 직장인, 은행원이 의기투합해 투잡으로 개업한 기린아는 픽시 라이더들을 위한 식당으로 시작했다.

픽시를 타고 가던 사람이 잠깐 멈춰 (곧 완공 예정인) 픽시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우고 간단하고 맛있는 음식을 포장해서 갈 수 있도록 한 것. 6000원으로 통일한 네 가지 메뉴는 일체의 화학 조미료 없이 훤히 뚫린 오픈 주방에서 만들어진다. 벽에는 모든 재료들의 원산지를 포함해 양념 소스의 상표명, 포장지 재질까지 써놓았다.

제일 인기인 브로콜리 치킨을 시키면 5분에서 7분 안에 굴소스에 볶은 닭가슴살과 밥이 따로 포장돼 나온다. 중식답지 않게 기름기가 거의 없으면서 든든해 몸매 관리 중인 사람의 영양식으로도 손색이 없다. 건강에 대한 약속 외에도 가게 곳곳이 주인장들의 소소한 신념으로 넘쳐나 보는 재미가 있다.

프리미엄 버거 전문점 '버거 프로젝트'
가게에는 '꼭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들만 있는다'는 신념 아래, 식당 인테리어도, 직원들의 유니폼도, 포장 용기까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다. 몇 안 되는 장식 중 하나인 빈티지 라디오는 작동이 되기 때문에 갖다 놓았다고. 식당 안에서 먹는 것, 가져가는 것 모두 가능하며 큰 길을 건너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배달도 해준다. 구체적인 배달 가능 지역은 홈페이지(www.girina.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예 간단함보다는 정성에 초점을 맞춘 곳도 있다. 홍대 벤또 전문점 신칸센에 가면 2단으로 쌓은 '정성 가득' 도시락에 감탄하게 된다. 꽃무늬 찬합의 뚜껑을 열면 절임, 구이, 튀김, 샐러드가 칸칸이 들어있는 반찬 통이 나오고 그걸 들어내면 자작하게 깔린 초밥 위에 메인 디시가 탐스럽게 올라가 있다.

단무지 하나도 직접 무쳐 나오는 신칸센에서 데워 나오는 음식이라고는 장국뿐이다. 모든 구이와 튀김은 만들어 놓고 데우는 것 없이 그 자리에서 볶고 튀겨 만든다. 장어는 국내산 생물 장어를 바로 잡아 손질만 해서 가져오고 연어는 아예 식당에서 직접 손질한다.

"음식을 데우면 아무래도 맛이 떨어지죠. 특히 고기는 전자레인지에 넣으면 냄새가 나고 직화 구이 특유의 불맛도 사라지기 때문에 바로 만든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나요. 그래서 모든 메뉴가 테이크 아웃이 가능하지만 저는 식당에서 바로 드시는 것을 더 추천하는 편이에요."

벤또 하나를 만드는 데 10분 가량이 걸리고 주문이 밀릴 경우 그보다 더 걸릴 때도 있지만 예쁘고 정갈한 반찬과 갓 만든 음식만의 정직한 풍미는 기다리는 불만을 상쇄시킨다. 메뉴에 써놓은 설명처럼 '팔 떨어지게 두드려 만든' 정성스런 가정식이 그리울 때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가격도 6000원대부터 최고가인 장어 벤또가 1만1000원대로 상당히 합리적인 편.

이태원과 홍대를 중심으로 자고 일어나면 한 집씩 생기는 프리미엄 버거 가게와 벤또 가게는 사람들이 음식에 요구하는 바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코코로 벤또에서 가장 잘 팔리는 메뉴의 가격은 9000원대. 이는 한국인들도 비로소 음식에 돈을 쓰기 시작했다는 표면적인 사실 이상이다.

이전에는 데이트할 때나 따졌던 음식의 디자인을 이제는 혼자서도 즐기기 원한다. 느긋이 앉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없어 포장을 해갈지언정 맛있고 건강하고 또 기왕이면 예쁘기까지 바라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맛과 모양, 건강이라는 삼박자를 갖추지 못했을 경우 5000원도 쓰기 아까워한다는 뜻도 된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