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기로 소문난 식당들의 최고 단계 도전기

맛이 아닌 고통을 즐긴다는 점에서 매운 맛 즐기기는 확실히 변태스러운 취미다. 게다가 매운 맛에는 내성이 있어 경험치를 쌓은 이들은 "더더더 맵게!"를 외친다.

나날이 업그레이드하는 이들의 대항마는 단계별로 매운 맛을 선보이는 식당이다. 만만한 1단계부터 육두문자 튀어나오게 하는 10단계까지.

선택의 기회를 주었으니 먹고 울지나 말라는 뜻이다. 음식 아닌 음식, 식사가 아닌 도전. 뜨거운 여름, 활활 타오르는 한판 전쟁이 시작됐다.

"임산부, 노약자, 고혈압, 위궤양, 컨디션 안 좋은 분 사절"

공포영화 예고편이 아닌, 식당 벽에 붙어 있는 문구다. 아래에는 '사고 발생시 민형사상 책임 없음'이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 매운 짬뽕을 파는 이 식당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지만 짜증내며 돌아서는 이들은 없다. 오히려 식당 바깥 유리에 주인이 써 붙인 메시지 '제발 짬뽕 드시고 주변에 토하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보며 비장한 각오를 다진다.

어떤 이들의 손에는 우유가 들려 있기도 하다. 물론 벽에 걸린 명예의 전당에 자신의 얼굴을 올리고 싶다면 우유 같은 꼼수는 쓰지 말아야 한다. 이 폭탄 짬뽕에 대한 화려한 후기는 각 온라인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옥을 보았다', '악질적으로 매운 맛', '위장을 꺼내서 씻고 싶다' 등등.

매운 맛 취미는 일종의 엔도르핀 중독이다. 극도의 매운 맛에 공격당한 몸은 마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처럼 응급처치로 즐거움의 물질을 내보내게 되고 여기에 한번 맛을 들인 이들은 다시 그 고통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처절한 이유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 맛이 '당긴다'면 매운 맛은 '사무친다'.

맛은 미식가를 양산하지만 고통은 파이터를 낳는다. 각종 자극에 단련된 뇌와 혀는 점점 더 강한 매운 맛을 찾게 되는데 이들을 자극하는 새로운 도전거리가 생겼으니 바로 매운 맛을 단계별로 분류한 식당이다. 적게는 3단계, 많게는 10단계까지 맵기를 나눈 이 식당들에서는 적당한 매콤함부터 불을 뿜을 듯한 매운 맛까지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다.

음식 가지고 장난친다는 일부의 비난이 무색하게 식당 앞에는 도전을 하러 온 파이터들과 호기심 하나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맵기로 소문난 식당들의 최고 단계를 체험해 보았다.

불타는 갈비, 매운대의 '완전 매운 맛'

<매운대>의 매운갈비찜
올해 초 문을 연 압구정동 매운대는 매운 갈비찜과 매운 닭볶음탕 전문점이다. 기본 매운 맛과 더 매운 맛, 완전 매운 맛, 총 3단계로 나뉘어진다. 청양고추와 베트남 고추를 포함해 4가지 고추로 맛을 내는데, 폭탄처럼 단번에 입 안을 공격하는 베트남 고추와 그보다 덜 맵지만 깊이가 있고 오래 지속되는 청양고추, 그리고 공개를 꺼리는 나머지 고추들의 배합이 매운 맛의 비결이다.

'완전 매운 맛' 갈비는 버너 위에서 끓기가 무섭게 매운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하는데 젓가락으로 한 번 휘젓고 살짝 빨아 먹는 것만으로도 그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완전 매운 맛을 찾는 사람은 전체 손님의 20% 정도예요. 주문을 받더라도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는 살짝 덜 맵게 해서 내요. 너무 매우면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으니까요."

'완전 매운 맛'은 그 이름답게 먹는 순간부터 탄식을 일으킨다. 서서히 찾아오는 매운 맛이 아니라 단 번에 입 안을 쓰리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맛이다. 게다가 지속성도 엄청나 화끈거림이 1시간 이상 지속되고 약 6시간이 지난 후에도 입술에 아릿한 느낌이 남는다.

그러나 '먹을 수 있는 매운 맛'을 지향하는 만큼 중도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버너의 불을 끄고 천천히 먹다 보면 헐떡거리면서나마 다 비울 수 있다. 갈비를 찔 때 매운 소스 외에 과일 소스를 같이 넣어 요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친절한 사장이 가게 곳곳에 매운 맛을 중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비꼬> 일본식 매운카레
사이드 메뉴인 계란찜과 치즈 사리는 매운 맛에 자신 없는 이들에게는 필수다. 계란찜은 제법 큰 대접에 담아 나오지만 눈물을 찔끔거리며 푹푹 떠 먹다 보면 어느새 바닥을 보인다. 곁들여 나오는 생 양배추는 아주 달큰하고 싱싱해서 불 붙는 입 안을 달래기에 좋고 식혜와 양배추 녹즙(양배추와 요구르트를 갈아 만든)도 도움이 된다.

초불 카레, 아비꼬의 '지존 단계'

카레는 매운 음식계의 신성이다. 2008년 일본발 매운 카레 전문점 코코이찌방야가 오픈했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아비꼬가 문을 열었다. 아비꼬에는 총 6단계가 있는데 전혀 맵지 않은 '아기 단계'가 첫 번째, 그 위로 1, 2, 3 단계, 불닭의 3~4배라는 '지존', 맵기보다는 아픈 '신'이 최고 단계다. 1호점인 홍대점에는 신단계에 도전한 이들의 숫자와 성공한 이들의 숫자를 벽에 붙여 놓았는데, 2010년 7월말 현재 254명이 도전해 94명이 성공했다 (단 10분 안에 먹어야 한다).

"신단계의 경우 보통 3분의 1 정도 먹다가 밖으로 나가서 1L 짜리 우유를 사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아요. 먹다가 기절까지는 아니지만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못 나오는 손님들도 종종 봤죠."

현재 홍대점을 제외한 다른 지점에서는 신단계의 주문을 받지 않고 있으며 홍대점에서도 피크 타임에는 '20분 이벤트'를 자제하고 있다. 식당 측은 특별히 매운 맛을 경험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그 아래인 '지존' 단계를 추천하는데 지존 카레 역시 심상치 않은 주홍색에 먹기 전부터 매운내가 솔솔 풍긴다. 베트남 고추를 비롯해 7가지 재료를 넣어 만든 특제 소스 때문이다.

<페르시안 궁전>의 이란식 매운카레
첫 숟갈부터 톡 쏘는 맛이 입 안을 자극하며 혓바닥이 따끔거리지만 체내 분비물을 다 쏟아낼 정도로 인정사정 없이 맵지는 않다. 따라 나오는 밥과 토핑(돈까스, 치킨, 새우 등에서 선택 가능)을 얹어 천천히 먹다 보면 매운 맛 외에 카레 고유의 향도 즐기면서 맛있게 비울 수 있는 정도. 게다가 먹고 난지 30분 정도면 매운 맛은 싹 사라진다. 물론 짬뽕 국물 정도에 진땀 흘리는 사람에게는 무리다.

매운 맛을 덜 수 있는 사이드 메뉴는 없지만 모든 카레가 리필이 되므로 '지존'이나 '신' 단계를 먹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에게는 '아기' 카레로 바꿔준다. 온갖 재료를 넣고 반 나절 이상 푹 무르도록 끓인 정통 일본식 카레는 기름기와 화학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아 매운 맛이 없더라도 충분히 맛있다.

이국의 매운 맛, 페르시안 궁전의 4단계 카레

중동식 카레와 케밥을 전문으로 파는 페르시안 궁전에서는 카레의 맵기를 2부터 10까지 나눠 놓았다. 10 단계에 도전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면 사장은 조용하지만 강경하게 말한다.

"이 식당 운영한 이후로 5단계 이상 먹고 제대로 걸어 나간 사람 한 명도 못 봤어요."

이곳에서는 5단계 이상을 주문할 경우 각서를 받는다. 탈이 나더라도 식당 측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다. 실제로 5단계를 주문하는 사람은 전체의 0.1% 정도. 당당히 도전을 외친 이들도 먹다가 쓰러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인해 4단계를 주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대부분인데 4단계 역시 말려준 게 고마울 정도로 경악스러운 맛이다.

금속 포트에 담겨 나오는 카레는 가까이서 냄새를 맡는 것만 해도 눈이 살짝 아린 듯한 느낌이 들고, 첫 번째 숟갈에 '억' 소리가, 두 번째 숟갈부터는 입술이 붓기 시작한다. 밥 없이 그냥 퍼 먹었다가는 와사비를 통으로 삼킨 것처럼 잠시 코에서 김을 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먹다가 목에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식사 끝날 때까지 기침을 해야 하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비결은 카레에 들어가는 향신료로 24개 중 8개가 매운 맛을 낸다. 이중 펠레펠은 그냥 먹으면 자칫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 있으며 사하라 고추는 손으로 만진 후 무심코 눈으로 옮겼다가는 실명의 위험이 있는 무시무시한 식물이다.

"청량 고추는 아무리 매워도 낙지볶음 정도에요. 향신료 중에는 고추보다 몇 백배 매운 것들이 부지기수고 또 이것들을 조합하게 되면 그 매운 맛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요."

달콤한 중동식 요구르트인 마스트와 함께 먹으면 매운 맛이 약간은 덜해지며 비상시를 대비해 주방에는 약도 구비돼 있다.

맛있게 매운 맛은 없다?

매운 맛의 극한 체험이라는 슬로건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지만 사실 식당 주인 입장에서는 애타는 일이다. 맛있는 것과 매운 것은 사이 좋게 공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탕이나 다른 감칠 맛 나는 재료들이 매운 맛을 커버해주기도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너무 매우면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아비꼬 실장의 말에 따르면 재료들을 제 아무리 기술적으로 배합한다고 해도 캡사이신의 용량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가면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매운 맛이 다른 맛을 압도해버리기 때문이다.

"제 생각에 즐기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단계는 3단계까지에요. '지존'부터는 카레 맛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고 '신' 단계로 가면 식사가 아닌 거의 도전이죠."

식당에서 웬만하면 최고 매운 등급을 권하지 않는 이유는 안전을 위해서 또는 손이 많이 가서이기도 하지만, 공들여 만든 음식을 캡사이신으로 덮어버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도 어쩌랴, 고통에 중독된 이들은 오늘도 좀비처럼 식당 앞에 줄을 서고 벽에 걸린 명예의 전당은 점점 늘어만 간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포유동물들은 매운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익스트림 핫' 증후군은 인간이 좀 더 인간다워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스트레스에 절은 현대인들에게 허락된 합성된 행복일 수도 있겠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