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식과 자유 둘 다 만족시키는 무한 매력

여름이 다가오면 더위에 지친 도시 남성들을 유혹하기 위한 '쿨 비즈' 장사가 시작된다.

쿨 젤라또, 아이스 재킷, 냉감 소재, 쿨 프레시 수트 등등 듣기만 해도 귀를 얼려버릴 것 같은 새로운 이름들이 쏟아져 나오고, 소비자들은 매번 속으면서도 다시 옷가게로 향한다.

여기에 매체들까지 가세해 쿨 비즈의 유래부터 시작해서 '모든 회사원들이 쿨 비즈 룩을 입을 경우 1년에 전기 요금이 3000억 원씩 절약된다'는 통계까지 내미는 바람에 쿨 비즈는 전 지구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매년 반복되는 이 난리통을 한국의 몇 안 되는 클래식 수호자들은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시원한 기능성 소재가 개발되고 남자들이 흑백 코디 일색에서 벗어나 다양한 파스텔 컬러에 익숙해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반소매 셔츠, 노타이 등 쿨 비즈 룩의 일부 요소는 신사의 격식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정통 클래식에 반소매 셔츠라는 아이템은 없어요. 반소매는 패턴상 몸에 딱 맞게 만들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실루엣이 벙벙해지고 포멀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죠." 비스포크 수트를 만드는 정명숙씨의 말이다.

톰 브라운 11 S/S
땡볕 더위에도 신사의 품위는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그러나 반바지에 있어서만은 관대하다. 한국에서 반바지가 일명 '츄리닝'과 함께 성의없는 옷차림의 대명사라면 해외에서는 신사의 턱시도에도, 10대의 민소매 셔츠에도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변화무쌍한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남성 클래식 패션 블로그 '일 구스또 델 씨뇨레'를 운영하는 이헌씨는 반바지를 이지 웨어로만 활용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신사는 맨 살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클래식계의 불문율이지요. 그러나 일명 변형된 클래식의 세계에서 반바지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합니다. 세계적인 남성복 박람회 피티 워모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프랑스 패션 매거진 <무슈>의 편집장을 보았습니다. 포멀한 수트 재킷 아래에 반바지를 입고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스타킹을 신었더군요. 물론 신발 역시 클래식한 신사화를 매치했는데 아주 근사한 모습이었습니다."

반팔은 안 되도 반바지는 된다?

반바지를 '소파에서 뒹굴거리는 남편의 코스튬'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조합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것은 재킷과의 매치다.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자주 보여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도 부르는 이 코디네이션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다.

목 늘어난 티셔츠를 버리고 각 잡힌 재킷으로 파트너를 바꾸는 순간 반바지는 자유롭고 위트 넘치며, 남성다운 아이템으로 변신한다. 한없이 단단해 보이는 재킷 아래 경쾌하게 뚝 잘려나간 바지는 '나는 격식을 갖추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은 남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엠포리오 아르마니 11 S/S
재킷과 바지의 소재를 달리하면 포멀과 캐주얼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고, 소재가 같으면 트위스트된 클래식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재킷으로 멋을 내고 싶지만 30도를 웃도는 날씨가 도저히 이를 받쳐주지 않는다면 셔츠와 입는 것도 좋다. 눈을 시원하게 만드는 하늘색이나 흰색의 옥스퍼드 셔츠를,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약간 타이트한 핏으로 골라 입으면 편안하면서도 신경 쓴 옷차림이 된다.

반바지 코디네이션에는 액세서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반바지가 날려버린 무게감을 다른 것들로 채워 넣어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모자, 벨트, 타이, 안경, 시계, 양말, 신발, 가방, 발찌, 수염까지, 무게 조절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 집에서 입는 반바지처럼 후줄근해 보일까봐 걱정될 경우 단정한 감색 타이에 포켓 스퀘어를 꽂으면 순식간에 중후함이 실린다.

반대로 너무 경직된 분위기가 싫다면 컨버스 백이나 플립플랍(일명 쪼리)을 신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된다. 이런 식으로 액세서리의 경중만 제대로 조절한다면 집에서 입던 바지뿐 아니라 운동할 때 입는 짧은 반바지도 얼마든지 드레스 업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멋진 반바지 착장은 긴 팔 셔츠의 소매를 두 세 번 접어 올리고 반바지 속에 넣어 입는 거에요. 색깔은 아주로 에 마로네(azzurro & marrone), 즉 블루와 브라운의 조합이 멋지죠.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컬러 조합인데, 하늘과 땅의 색입니다. 여기에 벨트를 하고 양말은 생략한 채 덱 슈즈를 신는 거에요. 키가 크다면 발찌 같은 액세서리를 해주는 것도 좋습니다. 편하기 위해서 반바지를 입었다는 생각보다는 반바지를 입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신사라는 의식이 중요한 것 같아요."

던힐 11 S/S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반바지라고 해서 절대로 싸지 않다는 사실이다. 반 토막짜리 바지이니 가격도 반 토막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구조와 핏, 즉 바지의 핵심적인 아름다움을 담당하고 있는 부분은 모두 무릎 위에 자리하고 있다. 패턴과 재봉 등 까다로운 공정에 들어가는 노임은 긴 바지와 다를 바가 없고, 차이가 있다면 무릎 아래로 들어가는 원단 값 정도인데 이는 전체 비용에서 극히 작은 부분이다.

남자, 무릎을 드러내다

이왕 반바지를 시도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좀 더 과감해져 보는 것도 좋다. 올해 반바지 트렌드는 무릎 위로 훌쩍 올라오는 짤막한 디자인이다. 폴 스미스, 닐 바렛 등 많은 디자이너들이 반바지를 내놓았고 이를 멋지게 보일 수 있는 스타일링을 제안했다. 그 중 아르마니가 선보인 착장은 무성한 종아리 털을 부끄러워하는 한국 남자들이 솔깃해할 만하다.

제모도 남세스럽고 그렇다고 이탈리아 노신사처럼 반 스타킹을 신을 수도 없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레깅스. 까만색 레깅스를 신고 같은 색의 반바지를 덧입은 모델은 캐주얼하면서도 확실히 갖춰 입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반바지 본연의 역할은 사라졌지만 어차피 지금은 기능복으로서의 반바지가 아닌 패션으로서의 반바지를 이야기하는 중이다.

아무리 신경 써서 멋지게 반바지를 차려입었다고 해도 한국 실정상 반바지 차림으로 행차할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다. 심지어 골프 클럽 중에서도 반바지 착장을 금지하는 곳이 많다. 이헌씨는 반바지는 사적인 모임이나 휴가, 또는 패션 필드에서만 활용하는 것이 멋도 내면서 TPO를 고려하는 남자의 태도라고 말한다.

폴 스미스 11 S/S
"사실 반바지를 입었다고 해서 체감 온도가 현저히 내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실질적인 효과는 일탈이죠. 여자들이 짧은 치마로 기분 전환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틀에 박힌 착장에서 벗어난 스타일링은 보는 사람의 눈도 즐겁게 만들어주잖아요. 사장님이 평소보다 밝은 색 넥타이를 매고 왔거나 신입 사원이 핏 좋은 셔츠를 입고 온 날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