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금산 보석사호젓한 평강 보고 승병장 자취 느끼고 오색 종이에 소원 적고

아름다운 보석사를 만나는 첫 관문, 일주문
궁박한 신심 탓에 부러 찾아들지는 않지만 여행길엔 약속이나 한 듯 산사 한 곳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덧 무심코 들어선 산사를 즐기는 방법도 제법 익숙하다.

그저 낭창하게 도량을 설렁설렁 거닐며 사찰마다 지니고 품고 있는 얘깃거리에 촐랑대며 달리기도 하고,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잠시나마 여행에 들뜨고 할랑대는 마음결을 가다듬어 보기도 하는, 나름 소중한 장소로 의미 부여를 한다.

뜨겁던 햇살이 한풀 꺽인 늦은 오후, 금산의 보석사(寶石寺)에 들어섰다. 한여름 더위에 절은 여행객을 맞이한 일주문은 순정한 나무의 모습 그대로, 단청의 흔적조차 없이 말갛게 나무결을 드러낸 채 단아하고 정갈한 자태다.

타박타박. 느린 걸음으로 일주문 곁으로 난 샛길을 따라 들어서자 하늘로 쭉쭉 뻗어 오른 노송과 전나무가 호위병처럼 열지어 있고, 도무지 나이가 가늠되지 않는 아름드리 나무 등걸마다엔 수림 틈새를 비집고 들어 선 뽀얀 햇살이 내려앉아 사뭇 몽환적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나무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너흘너흘 길 따라 흐르고 감돌며 걷는 이의 마음까지 싱그런 초록빛으로 물들이더니 이내 한여름 더위의 편린들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차오르는 평강.

보석사의 또 다른 보물, 산신각
보석사는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오르막이나 굽어짐이 없는 평지다. 하기에 훤히 열린 길을 걷는데 고요함을 깨뜨리는 한무리의 웅성거림 사이로 무성한 잎을 매단 채 신줄까지 둘러친 거목이 위풍당당하다.

한자리에서 뿌리 내린 채 천년이 넘는 시간을 꿋꿋히 살았다는 은행나무가 유유한 시간 속에서 다섯개의 다른 몸들이 하나로 얽혀 연리목이 되었고, 나라에 위급이 닥치면 슬피 울기도 한다는 전설까지 보태졌지만, 은행나무는 위엄 대신 여전히 늘어진 가지로 그늘을 드리우며 말없이 보석사를 바라볼 뿐이다.

비록 나무라 할 지라도 길고 먼 시간을 이겨 낸 생명력에 경외감이 든다. 그 곁으로 깨어지고 지워진 비석들이 역사의 편린을 품고서 군락을 이룬 채 전하고픈 이야기를 외면하며 스쳐가는 걸음들이 야속한 듯 망연히 바라본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은행나무 앞을 벗어 나 경내로 들어서자 소담하지만 기품을 잃지 않은 고고한 자태의 도량이 평온하다. 승병장 영규대사가 머물렀다는 의선각과 산신각, 그리고 예전의 출입구였던 천왕문, 곳곳은 그렇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옛 모습 그대로 시간의 흔적을 품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보석사'란 이름에 대한 하릴없는 선입견 탓이었는지, 아니면 전설이 역사임을 반증하겠노란 천박한 갈망이 앞서서였는지 '황금'의 흔적을 쫓던 시선은 경내에서 유일하게 고운 단청을 입은 대웅전에 간단없이 꽂혔다.

보석사 대웅전
내달려 대웅전에 있다던 황금 불상을 찾고자 무례인줄도 잊은 채 대웅전 안을 기웃거리는데 하마 어이할까. 잃어버린 황금부처의 모습은 도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대웅전은 황망하게도 휘황한 황금 부처가 머물기엔 너무 단아하고 소박해 오히려 남루한 호기심으로 찾아든 이를 무렴케 했다.

그저 상상속 황금 부처를 그리며 혼자 뎅그마니 떨어져 있는 산신각을 살피러 문전을 기웃거리자 비구니 한분이 다가와 보석사의 영화와 역사를 나직히 전해준다. 그럼에도 문짝에 가득 쓰인 기원 글귀와 산신각의 신령함에 주춤거리는데 보석사에 오면 산신을 배알해야 한다는 재촉에 살그머니 문고리를 당겼다. 때 맞춰 산신각의 풍경이 작은 울림을 내고 보석사의 뜨락에는 맑고 고운 풍경 소리가 너울댔다.

범종루로 가는 길. 고색이 창연한 요사채 쪽마루에서 고운색의 주머니를 쌓아 놓고 아이들과 담소를 나누던 스님이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조분하게 설명한다."저 앞의 은행나무 열매를 담은 주머닌데 행운을 나누는 거예요." 오로지 보석사의 행운을 챙기겠다는 욕심으로 냉큼 복주머니 두개를 들었다. 동글동글한 은행알을 만지작거리자 어떤 행운이 들어섰을까. 출처불명의 기분 좋은 웃음이 스물스물 배어났다.

보석사로 들어서는 두 문중 한곳인 범종루를 오르다 걸음을 멈췄다. 종루 기둥마다 둘러 쳐 놓은 소원띠에는 오색의 작은 종잇장마다 소원이 가득했다. 누구든 자신의 간절한 바램을 이렇게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청신한 자기 고백이고 아름다운 내면의 성찰이 아닐까. 종이색 만큼이나 곱디고운 소원을 가득 매단 종루 기둥이 색동옷을 입은 아이처럼 발랄하다.

보석사에서 가장 높은 곳, 범종루에서 내려다 보니 이우는 햇살 아래로 보석사가 한눈에 잡힌다. 사찰은 지나치게 화려하면 부담스럽고, 너무 웅장하면 불편하다. 과한 단청의 휘황함은 오히려 천박하고, 지나친 엄숙주의의 덧칠은 도량의 본색을 흐린다.

보석사로 들어서는 범종루 길
하기에 휘어진 본연의 나무둥치 그대로 들보가 되어 고찰을 받치고 있는 보석사의 진솔함이 오히려 산사의 적요속에서 고아함을 돋우고, 품고 지녀야 할 고찰의 면면은 소박하지만 부족함 없이 보담고 있기에 정갈하고 단아함이 주는 울림은 더욱 깊고 진한 여운으로, 알 수 없는 안도감은 배시시 미소를 머금게 한다.

보석사는 기운이 지치도록 먼 길을 걸어야 닿는 절해고도의 산사가 아니며, 지나치게 커다란 규모에 주눅들어 억지 겸손을 떨거나 눈치 보며 기웃댈 고찰도 아니다. 하기에 마실 나서듯 편안한 걸음으로 들어서 호젓한 분위에서 평강을 찾고, 영규대사의 자취처럼 세속의 삶과 이웃하고 있다는 친근함 속에, 마음 한자락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는 소원 하나를 살며시 열어 놓고 매달 수 있는 보석 같은 보석사f였다.

돌아오는 길, 이미 해넘이가 시작되어 산그림자가 깊다. 그러나 마음엔 보석사에서 미리 밝힌 촛불 하나가 환하게 빛을 냈다.


금산 보석사 사당

글·사진=양지혜 여행작가 himei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