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의 주방] (12) 싱가포르싱가포르 식 머드 크랩 요리, '더 크랩하우스'

타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음식이 한창 한국을 강타할 때, 유독 싱가포르만은 조용했다. 똠양꿍, 안남미 같은 단어가 더 이상 생소하지 않게 된 지금에까지 싱가포르 전문 음식을 표방하는 레스토랑은 없다. 왜일까?

"싱가포르만의 음식은 거의 없다고 보면 돼요.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여서, 가장 많이 먹는 음식도 유래를 좇아 올라가다 보면 다른 나라가 원산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원산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싱가포르의 음식 문화는 풍부하기 그지없다. 싱가포르 문화의 뿌리를 말할 때 '페라나칸'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는데, 말레이 반도로 이주한 중국인 남자와 말레이시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이르는 말로 음식으로 따지면 말레이식으로 변형된 중국 음식이다.

중국, 인도, 동남아뿐 아니라 중동까지…각지의 영향을 받은 퓨전 음식의 천국인 싱가포르는 넘쳐나는 풍부한 해산물에, 활발한 외식 문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국적의 음식들을 자기들 것으로 흡수했다.

말레이시아 음식인 사테(숯불 고기 꼬치)가 뿜어내는 연기는 해질 무렵 싱가포르 하늘을 가득 메우고, 남인도에서 유래한 로티 프라타(밀가루 반죽에 각종 재료를 넣고 팬에 구운 빵)는 싱가포르인들의 단골 아침 식사다.

블랙페퍼 크랩
중국에서 유래한 락사(코코넛 밀크로 만든 탕에 해산물 등을 넣은 쌀국수)는 본국을 떠난 싱가포르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음식이며, 그들은 말레이시아식 샐러드 로작(파인애플, 두부, 콩나물, 구아바 등을 섞은 위에 새우 가루와 라임 주스로 만든 드레싱을 뿌린 음식)을 들어 자신들의 복잡한 문화 정체성을 설명한다.

이 개방적인 음식 문화 속에서도 당당히 '싱가포르 표'를 붙일 수 있는 음식이 하나 있다면 바로 크랩이다. 동남아에서 잡히는 머드 크랩에 고유의 칠리 소스를 넣어 매콤하게 요리한 칠리 크랩은 온전히 싱가포르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매년 7월에 열리는 싱가포르 음식 축제에서 번번이 최고의 음식으로 선정된다.

머드 크랩은 동남아 지역에서만 서식하므로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는 상당히 희귀한 음식으로 꼽히지만 딱 한 곳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동남아 머드 크랩 수입회사와 지난 해 문을 닫은 크레이지 크랩의 주방이 만나 만든 압구정동의 '더 크랩하우스'다.

껍질 두께만 3mm, 진짜 동남아 머드 크랩

"전 세계 머드 크랩의 70%는 싱가포르에서 소비할 정도로 크랩 요리는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음식이죠. 다른 음식들은 코코넛 밀크, 레몬잎, 야자 등 생소한 재료가 많이 들어가 한국 사람들이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반면에, 칠리 크랩은 매콤달콤한 맛이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 딱 맞아요. 싱가포르에 가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씨푸드 전문점에서 한국 사람들이 전부 이 칠리 크랩을 먹고 있죠."

동남아식 게살 볶음밥
압구정동 더 크랩하우스의 강원식 대표는 원래 머드 크랩을 수입하는 일을 하다가 식당을 열었다. 당연히 더크랩하우스에서 내는 모든 크랩은 동남아 현지에서 직접 잡아 올린 것으로 마리 당 700~900g에 육박하는 오리지널 머드 크랩이다. 먼 거리를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냉동을 하기는 하지만 맛 차이는 크게 나지 않는다고 한다. 더 크랩하우스 한 곳을 위해 바다를 건너 크랩을 잡아 오는 셈이다. 다른 게로 대체할 수는 없을까?

"여러 가지로 시도 해봤어요. 꽃게, 대게, 털게, 킹 크랩 등으로도 만들어 봤지만 아무래도 달라요. 현지의 맛과 모양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계속 머드 크랩으로 만들고 있어요. 조만간 지점을 열 계획인데 그러면 좀 더 공급이 수월해지겠죠."

맛도 맛이지만 머드 크랩이 다른 게들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 그 박력 있는 모양새다. 과장을 조금 보태 거의 사람 손만한 집게 발이 그릇 위에 늘어져 있어야 비로소 싱가포르 식 크랩 요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

크랩 요리법은 나라마다 다른데 싱가포르만의 특징이라면 기름에 튀기지 않는 것이다. 보통 대형 크랩을 조리할 때는 먼저 기름에 튀긴 후 소스를 넣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냄비에 일정량의 물과 크랩, 소스를 한꺼번에 넣어 끓인다. 이렇게 요리하면 담백하면서 칠리 소스의 매콤한 맛, 견과류의 고소함, 달콤한 맛이 한데 어우러진 중국풍의 걸죽한 소스가 탄생한다.

머드 크랩은 그 무시무시한 모양답게 껍질도 대단히 두꺼운데 집게 발 부위의 껍질은 거의 3mm에 육박한다. 망치를 주더라도 식탁 위에서 부숴 먹기는 힘들므로 주방에서 모양만 겨우 유지할 정도로 깨서 나온다. 포크나 손을 이용하면 쉽게 껍질을 들춰낼 수 있는데 그 안에 거짓말처럼 드러나는 하얗고 야들야들한 속살은 매운 소스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칠리 크랩이 거의 90% 이상의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대중적인 맛이라면 좀 더 마니악한 크랩 요리도 있다. 까만 통후추를 넣어서 만든 이 그것인데, 시뻘건 게딱지 위에 얹어진 시커먼 소스가 눈을 자극하며 동시에 숨이 막힐 것 같은 흑후추의 향미가 코를 자극한다.

현지에서는 위에 코리앤더를 듬뿍 얹어 내오는 경우도 있지만 더 크랩하우스에서는 한국인들의 취향을 고려해 대신 송송 썬 파를 얹었다. 어쩐지 가스를 생성할 것 같은 알싸한 후추 맛은 중독성이 강해 한 번 페퍼 크랩을 맛본 이들은 이것만 먹는다고 할 정도다. 이외에도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냥 먹을 수 있는 소프트 쉘 크랩도 있다.

한 번 먹으면 중독,

칠리 크랩과 페퍼 크랩, 둘 다 먹다 보면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맵기 때문에 볶음밥과 후라이드 번을 함께 시켜 먹는 것이 좋다. 게장에 밥을 비벼 먹는 것처럼 슴슴하게 간이 된 볶음밥을 게딱지 안에 넣어 매운 소스와 함께 비벼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매운 맛을 중화시켜 주기도 하고 게살만으로는 살짝 부족한 식사량을 채워준다.

후라이드 번은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튀긴 빵으로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역시 그릇에 남은 소스를 묻혀서 함께 먹으면 맛이 두 배가 된다.

더 크랩하우스에서는 크랩 요리 외에도 파스타, 나시고랭, 미고랭, ?양꿍, 팟타이 등 동남아 대표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현지 맛에 충실하기 위해 소스 및 식재료를 타이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직접 수입해서 만든다. 얼마 전까지는 파스타에도 중간 크기의 머드 크랩이 하나 통째로 올라왔지만 최근에는 물량이 다해 새우로 대체하고 있다.

평일엔 낮 11시 30분에 문을 열어 밤 11시에 닫고 일요일에는 쉰다. 낮 3시 30분부터 5시까지 쉬는 시간.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