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 스토리텔링서 TV속 스토리텔러 등장, 취업준비생 지침서까지

덕수궁 정관헌-재현행사
고궁에 이야기꽃이 피었다. 엄마 등에 업힌 어린아이에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성근 노인까지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덕수궁 정관헌. 고종황제가 덕수궁으로 환궁하는 것을 기념한 축하연이 열렸다. 거문고와 가야금 등 우리의 가락이 연주되는 가운데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의 소리가 정관헌 안을 요동친다.

금빛 용포를 입고 온화한 미소를 짓는 고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대의 소리와 춤사위는 사뭇 진지하다. 부채를 손에 든 광대의 얼굴에 고종이 귀환한 것에 대한 기쁨도 표출된다.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라는 궁금증이 유발한다.

고궁, 스토리텔링과 만나다

명창 이희문 씨가 부르는 <창부타령>의 곡조에 따라 이를 지켜보던 시민과 관광객들은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춘다. 실제 궁정 연회를 재연한 자리가 마냥 신기한 듯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공연을 하는 이도, 이를 지켜보는 이도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귀빈을 접견하던 곳이다.

덕수궁-개막행사 국악인 이희문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된 후 1911년 재건한 곳으로, 덕수궁에서 가장 나중에 지은 건물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황제의 귀환'을 보여주는 고종황제의 환궁 축하연을 재연함으로써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흡수되는 장치가 마련된 셈이다.

10일부터 12일까지 '2010 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축제'는 올해 4회째를 맞았다.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덕수궁을 배경으로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전시회와 공연, 체험행사 등으로 전해줬다.

문화재청은 "문화유산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와 사연들을 찾아 그 속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꿈과 감성을 현대인에게 전하고, 이를 통해 문화유산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축제이다"고 설명했다.

덕수궁의 덕홍전에는 '궁, 근대와 만나다'를 주제로 스토리텔링의 체험관이 열렸다. 서양의 근대문물이 들어왔을 때의 모습과 사건을 그림과 글로 표현해 친근하게 다가온다.

'1887년 3월 6일, 그 날은 궁 안이 하루 종일 술렁거렸다. 눈이 파란 미국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면서 그 건물 안에 복잡하고 요상한 기계까지 설치하였다. 그리곤 사람들을 향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주변을 서성거리던 우리 대신들도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그건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 지 8년 만에 최고의 시설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경희궁 건청궁에 전등 두 개가 켜지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덕흥전 전시장
덕홍전에서 빛나는 샹들리에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짠한 기분이 밀려온다. 스토리텔링이 전해주는 감동은 실로 대단하다. 덕홍전과 고종황제의 사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898년 고종의 독살 미수 사건까지 소개된다. 고종황제가 평소 즐겨 마시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이 들어가 있던 이야기, 그 커피를 마신 순종이 지적장애를 앓았다는 이야기 등은 금세 궁의 숨결과 어우러진다.

궁 밖인 광화문광장에도 이 스토리텔링은 존재한다. 광화문광장의 좌우측에 폭 1m, 길이 365m로 각각 조성된 수심 2cm의 얕은 물길, 즉 '역사물길'은 조선시대부터 2008년까지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경복궁을 향해 걷다 보면 현재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역으로 훑어볼 수 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며 광화문의 현재를 만끽하는 절묘한 감성을 향유할 수 있다.

진정성을 전하는 스토리텔링

우리 주변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그 중에는 한 번 듣고 흘려버려도 되는 '시답지 않은' 농담과 거짓말이 존재한다. 반면에 진실성이 담겨 감동의 눈물을 끌어내는 이야기도 있다.

2년간 3000번의 장난전화를 건 50대 남성이 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장난으로 넘길 것인가, 아니면 문제의 시작으로 풀이해 볼 것인가.

덕수궁행사
최근 SBS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는 '2년 동안 3015번이나 112에 장난전화를 건 50대 남자의 이야기'를 방영했다. 이 남자는 112 신고센터에서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지만, 억울하다고 하소연한다.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는 그의 하소연에 대한 스토리텔링에 집중했다. 스토리텔러 김석훈의 목소리를 통해 시청자에게 장난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들려진다. 스토리텔러의 이야기가 전해질 때쯤 시청자들은 닫혀있던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는 다큐 형식의 취재물을 다룬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10월 첫 방송을 시작하면서 다큐 방송으로는 처음으로 내레이션 대신 '스토리텔러'라는 표현으로 이야기꾼을 등장시켰다. 17일부터는 김C 대신 배우 김석훈이 참여하고 있다. 김석훈과 허수경은 스토리텔러로서 건조하게 사안에 대한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개입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말 그대로 진정성 있는 접근이 가능해진다.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의 최삼호PD는 "스토리텔러는 단순히 목소리를 넣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의 중심에서 감정을 이입해 시청자와의 교감을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며 "스토리텔러는 진정성 있는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방송에 목소리만 입히는 것이 아니고 직접 출연해 시청자와 소통을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스토리텔링은 최근 취업준비생에게도 갖춰져야 할 중요한 지침으로 부각했다. 유엔 산하기구인 유엔거버넌스센터 홍보담당관 김정태 씨는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갤리온 발행)를 통해 제품 명세서를 뜻하는 'specification'의 준말인 '스펙'을 쫓기보다는 자신의 강점을 살린 잠재력을 부각하라고 강조한다.

"진정한 나를 알고부터 내 일기는 달라졌다. 내 잠재력이 개발된 스토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도전에 대한 스토리, 만났던 멋진 다른 이의 스토리로 일기가 바뀌었다. 실패도 보물 같았다.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도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에겐 내 꿈과 나만의 스토리가 있다."

sbs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김씨는 그 사람의 방향, 가치, 역량, 그리고 행동이 담겨 있는 스토리를 추구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스펙은 사람을 밀어내지만 스토리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스펙은 혼자 키우는 야망을 만들지만 스토리는 함께 꾸는 꿈을 만들어준다"며 "스펙은 경쟁자를 만들지만 스토리는 협력자를 만든다. 스펙은 휘발성이 있지만 스토리는 접착성이 있다. 스펙은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 스토리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스토리텔링을 넘어 스토리 두잉(story doing)으로 진화할 것을 당부한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이야기를 넘어 실천으로 가는 과정을 거치라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스토리텔러가 아닌 스토리 두어(story doer)로서의 삶을 추천하고 있다.

"최고를 포기하자 유일의 길이 열리고, 상품임을 포기하자 작품으로 변해갔다"는 그의 말 속에는 한두 장의 이력서가 담을 수 없는 진정성을 대변하면서, 스토리가 스펙을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담겨져 있다.

한국 스토리텔링 연구소
"스토리텔링은 자기성찰의 기회이자 도구"

이야기와 사람, 심리를 접목해 자신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자기 발견의 스토리텔링', 즉 스토리텔링으로 나와 동시에 서로가 공감하고 성장할 수 있게 됐다.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교감할 수 있는 소통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더 나아가 자아 발견의 기회까지 확대된 스토리텔링의 의미를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소 을 통해 들어봤다.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소의 연원은.

서미애 소장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소규모의 모임으로 존재했던 기관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7월 공식적으로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소라는 명칭을 사용해 성인과 아이들에게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2007년 3월 광명시 평생학습원에서 '자기 발견과 의사소통을 위한 스토리텔링'의 성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첫 강의를 시작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가 부각했는데, 스토리텔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스토리텔링은 우리에게 새로운 분야가 아니다. 예전부터 우리 생활에 가까이 있었고 일상화되어 있었다. 다만 스토리텔링이 마케팅적으로 응용되면서 더 활성화된 것이다. 이미 아이들의 언어와 교육에 존재했다고 봐도 무관하다. 아이들과의 소통에 있어서 스토리텔링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고, 역사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무척 가깝다. 또한 최근에는 각종 연구를 통해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 활동이 상대방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강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기 성찰의 스토리텔링'이라는 강좌를 교육하고 있는데 어떤 뜻인가.

대개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가져라'라고 한다면 직설적인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정체성이 뭐지?'라며 의문을 품게 마련이다. 스토리텔링은 커뮤니케이션의 일환으로 보고 소통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자신이 경험한 스토리텔링 화법으로 전달하면 기승전결의 이야기구도가 나온다. 그 속에는 성공과 실패가 공존하며 상대방에게 같은 고민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면서 상대방도 그 고민을 공유함으로써 스스로 대안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기법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도 상대방에게 비지시적인 방법으로 대안을 제시한다는 게 강점이다. 상대도 더 편안하게 수용하고, 감정에 호소하면서 선택을 부여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 커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인도에서는 스토리텔링이 아예 민간요법으로 사용된다. 역사적 사실이나 신화 등을 계속 들려줌으로써 정신요법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스토리텔링으로 정신적인 고통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옛 이야기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몰랐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고, 상처가 치유되는 힘을 발휘한다. 심리치료 영역까지 확대된 셈이다.

주로 강의하는 내용은 무엇이며, 그 수용자들은 주로 누구인가.

맥 아담스의 이야기심리학을 도구로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고, 자기의 인생 대본을 탐색해 가는 과정이 있다. 또 '옛 이야기로 보는 나'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가진 객관화의 힘과 심리적인 효능을 활용하여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보고 갈등 상황에서 자기의 욕구와 바람을 표현하는 작업 과정을 강의한다. 주로 예술표현치료사나 독서치료사 등 전문 분야의 사람들이 많지만, 요즘은 일반 직장인들의 참여도 높다.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