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듀, 샤브샤브, 부대찌개… 가난과 기아가 빚은 세계적 음식들

의정부 부대찌개
"세계적으로 최고의 음식은 굶주림에서 나온다." - 조 맥퍼슨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면, 굶주림은 미식을 낳는다? 극심한 기아가 탄생시킨 음식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부터 한국의 부대찌개까지.

가난이 낳은 음식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자투리 음식의 적극적인 활용, 서로 다른 문화 간의 강제적 교류, 양을 늘리기 위한 풍부한 국물, 그리고 오래 두고 먹기 위한 각종 저장법.

지금은 한 나라를 대표하게 된 음식들의 눈물겨운 탄생 스토리를 들여다 보자.

추운 겨울, 언 빵을 녹이며 -

스위스의 퐁듀
작고 단단하고 부유한 나라 스위스에도 가난했던 시절이 있다. 겨울은 서민들에게는 특히 가혹한 계절로,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는 스위스의 칼바람은 대단했다. 겨우내 먹으려고 저장해둔 음식이 다 소진되면 가난한 농가에 남은 음식이라고는 찬바람에 딱딱하게 굳은 빵, 먹다 만 치즈, 와인 약간이 전부였다.

굳어버린 빵은 그대로 먹으면 잇몸이 찢어질 정도였기 때문에 농부들은 치즈에 빵을 녹여 먹을 생각을 했다. 퐁듀(fondue)는 '녹인' 이라는 의미의 불어이다. 카를롱이라는 열전도율이 낮은 도자기 단지를 버너에 올리고 치즈를 녹인 후, 눌어 붙음을 방지하고 향을 더하기 위한 포도주를 살짝 첨가, 그리고 여기에 빵을 넣어 흐물흐물하게 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었다.

산 속에 고립된 목동들이나 사냥꾼들로부터 출발해 농가로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가족들이 불 가에 둘러앉아 빵을 찍은 쇠꼬챙이를 냄비에 담근 채 겨울이 가기를 기다리던 풍습은 그대로 남아 서양 음식 중 유례 없는 공동 음식 문화를 만들었다. 따라서 퐁듀에 따른 에티켓도 엄격하다.

퐁듀용 꼬챙이로 찍은 음식은 이로 살짝 물어서 빼야 한다. 입 안에 쑥 넣어 꼬챙이 전체에 자신의 침을 묻혀서는 안 된다. 퐁듀에 쓰이는 빵에는 가난했던 기억이 그대로 묻어나는데 지금도 스위스인들은 입 천장이 벗겨질 정도로 단단한 빵이 아니면 정통 퐁듀용 빵이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고 한다.

빵 대신 랍스터를 먹으면 되잖아 -

미국의 랍스터
랍스터는 스테이크와 함께 가장 사치스러운 외식 메뉴로 꼽히지만 한때 미국에서는 '빵이 없으면 랍스터를 먹으면 되잖아'라는 말이 실제로 존재했다.

때는 서부개척시대,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무렵 플리머스의 플랜테이션 농장주 윌리엄 블랫포드는 농장 일꾼들에게 "여러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식사는 따뜻한 빵 대신 물 한 잔과 랍스터뿐입니다"라고 선포했다. 물론 인부들은 악덕 고용주(?)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숨기지 않았다.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와 메인 주에는 특히 랍스터가 발에 채일 정도로 흔했는데 인디언들은 랍스터를 밭의 비료로 사용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남아 돌아 썩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랍스터를 주로 먹는 이들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과 하인, 그리고 죄수들이었다. 랍스터의 벗기기 어려운 단단한 껍질이 이들의 서러움을 배가시켰음은 물론이다.

한 번은 메사추세츠 주의 한 농장에서 파업이 일어났는데 사유는 싸구려 식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협상이 끝나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파업은 종료되었는데, 계약서에는 "일주일에 3번 이상 랍스터를 식탁에 올리지 않겠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나가사키 짬뽕
물론 이는 미국에 한정된 일로, 유럽에서는 예전부터 랍스터를 고급 요리로 쳤으며 일부 문화권에서는 연인들의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미약 성분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미국 메인 주에서는 아직까지도 랍스터가 닭고기보다 싸며 매년 랍스터 축제를 열고 있다.

뜨거운 동족애를 버무려 -

짬뽕은 중국 음식이 아니다. 그럼 일본 음식인가? 정확히 말하면 일본 화교의 음식이다. 19세기 말 나가사키 지방으로 이주해 중식당을 운영하던 천핑순이라는 중국인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중국 푸젠성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무일푼으로 건너온지라 돈이 없어 배를 곯기 일쑤였다. 같은 민족이 주리는 것을 불쌍하게 여긴 천핑순은 닭과 돼지뼈를 우려 육수를 만들고 여기에 남는 야채, 고기 부스러기, 그리고 나가사키에서 풍성하게 나는 해산물을 이것저것 집어 넣어 면 요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찬폰, 즉 짬뽕의 시초다.

은 일명 하얀 짬뽕으로 불리는, 맵지 않은 맛이 특징으로, 이후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맵게! 맵게!"를 주문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지금의 붉은 짬뽕으로 바뀌었다.

노르웨이의 양머리 훈제
눈이랑 귀는 아버지 드세요 -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에서는 해산물, 그 중에서도 청어와 연어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들 외에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뜻밖의 전통 음식이 있으니 바로 양머리 요리다.

Smalahove로 불리는 이 음식은 양머리를 잘라 소금에 절이고 말려 훈제한 것으로,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노르웨이인들의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물론 지금은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에만 먹는 별미로 남아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은 음식답게 별다른 요리법 없이, 말라서 딱딱해진 양머리를 푸욱 무르도록 끓인 다음 감자나 다른 야채를 곁들이면 끝이다.

토막 내지 않고 그대로 접시에 담기 때문에 양의 눈, 눈썹, 콧구멍, 귀, 이빨까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머리 고기의 백미는 눈인데, 노르웨이 가정에서는 양머리의 눈과 귀를 누가 먹을 것인지를 두고 가정의 위계질서를 다시 확인했다고 한다. 당연히 가장인 아버지의 몫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쌀국수는 보트를 타고 -

베트남 쌀국수
19세기 하노이는 프랑스 귀족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그 전부터 쌀국수는 베트남인들의 주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전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쌀국수와는 확연히 달랐는데 그 이유는 베트남인들은 전통적으로 쇠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운송수단, 농업 등 활용 수단이 많았던 소 대신 베트남에서는 주로 돼지고기나 해산물을 많이 먹었고 따라서 당시의 쌀국수는 소뼈를 우린 국물도, 그 위에 얹은 양지머리 고기도 없는 형태였다.

쌀국수를 맛본 프랑스인들은 여기에 자기네들 식대로 쇠고기를 넣어서 먹기 시작했고 고기를 발라낸 뼈는 내다 버렸는데, 가난한 원주민들은 이를 모아 집으로 가져가 푹 고아서 국수를 말아 먹었다.

쌀국수에 얽힌 이야기는 그 유래도 슬프지만 전파 과정은 더욱 기구하다. 월남전 패망 이후 베트남인들은 낡아빠진 보트 한 채에 의지해 바다 위를 떠도는 보트 피플 신세가 된다.

받아주는 곳이 있으면 내리고 없으면 계속 바다 위를 유랑해야 하는 처지. 미국과 호주 등지에 겨우겨우 정착한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음식점을 차렸는데 그때 만든 것이 가장 만만한 쌀국수였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식이 되었으니 역시 사람이든 음식이든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일본의 샤브샤브
눈물의 전투 식량 -

얇게 썬 쇠고기와 각종 야채, 어묵, 두부 등을 끓는 물에 데쳐 먹는 샤브샤브. 샤브샤브는 '찰싹찰싹', 또는 '첨벙첨벙'이라는 의성어로, 데친 재료를 물에서 꺼낼 때 나는 소리를 뜻하는 일본어다.

그 명칭 역시 일본 오사카의 '수에로'라는 식당에서 처음 만들어졌지만 샤브샤브는 일본 음식이 아니다. 칭기즈칸 당시 만들어졌지만 현재 몽골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몽골 음식이라고 부르기도 뭣하다.

정확히는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 군대의 전투 식량이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전투 시 기마병이 일선에 나서고 후방의 부대가 식사를 준비해 그들을 보조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어느 날은 후방 부대가 적의 공격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전방의 기마병들은 먹을 것이 없어 허덕이다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를 본 칭기즈칸이 투구를 벗어 불 위에 걸고 물을 끓인 다음, 얇게 썬 양고기를 넣어 데쳐 먹게 한 것이 샤브샤브의 유래다.

만드는 법이 워낙 단순하다 보니 사방에서 원조를 주장하고 나서는데 우리나라 역시 전투 시 투구에 물을 끓여 음식을 데쳐 먹었고 이것이 지금의 전골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햄과 김치의 만남 -

미군이 탄 차를 쫓아가며 "김미 더 쪼꼬렛"을 외치던 시절, 미군부대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부대찌개가 흥행했다. 전쟁 직후 기아에 허덕이던 한국인들은 미군부대의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 버린 고기 부스러기, 햄, 소시지 등을 닥치는 대로 수집해 김치와 함께 큰 쇠통에 넣어 푹 끓였는데 이것이 바로 원조 부대찌개의 탄생이다.

돼지에게 먹이는 여물처럼 궁합이 맞지 않는 재료들을 되는대로 섞어 끓였다고 해서 꿀꿀이죽이라고도 불렸지만, 사실 부대찌개는 열량 보충의 목적뿐 아니라 맛에 있어서도 훌륭했다.

짜디짠 미제 햄, 달달한 통조림 콩이 김치 국물에 흠뻑 배어 이제까지 없었던 찌개맛이 탄생한 것이다. 결국 배불리 먹고 살게 된 지금에까지 부대찌개는 한국 식단의 한 부분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폐쇄적인 한국 식문화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성공적인 퓨전 음식인 셈이다.

다만 그 유래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최근까지 불량 재료를 사용해 구속된 부대찌개 업주들도 있다. 얼마 전 세계 각국의 정보를 담은 여행 안내서 <론리 플래닛>에 실린 부대찌개 관련 내용을 서울시 행정관이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굶주림의 기억이 꼭 숨겨야 할 만큼 창피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그 굶주림이 낳은 부대찌개의 맛이 환상적이라면 더욱 그렇다.

참고서적: <음식잡학사전>, 윤덕노, 북로드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