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선운사 도솔천미륵신앙과 밀접한 창건설화… '대웅보전'편액, 삼불회도 유명

선운사 대웅보전과 풍경
깊은 산속의 겨울 초입 날씨는 꽤나 변덕스러웠다. 한순간 시커먼 구름과 바람을 몰아오다가 이내 환한 햇살을 비추기를 반복해 선운사로 향하는 여정을 주춤거리게 했다.

그러나 더 지체하거나 이대로 돌아선다면 유난히 아름다웠다는 올 가을 선운사를 영영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멈칫대는 마음과 더뎌지는 걸음을 달래고 재촉해 일주문에 닿았다.

'도솔산선운사'란 횡액이 걸린 일주문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가뿐 숨을 고른다. '이 문을 넘어서면 신산한 삶을 벗어나는 희망의 땅, 미륵의 세상으로 들어서는 것일까?' 그러나 많은 이들의 염원이자 선운사의 꿈인 미륵의 현신은 아직 미완의 희망으로서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하기에 선운사는 미륵세상을 향한 변함없는 희망을 지니고 일주문을 들어서는 만물중생들을 위로하듯 사계절, 한량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맞이하고 품는다. 해서 혹자는 '도솔'이란 말의 뜻부터 알아야 선운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했지만, 그저 선운사의 수려한 경관만으로도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의 칭송과 예찬이 자자하다.

도솔천을 따라 오른다. 선운사로 가는 길의 무성한 숲에선 고목들이 풀어내는 짙은 수림향이 쉼 없이 날리고, 계절을 좇아 한층 깊어진 도솔천 물소리는 부산스런 발자국소리를 재우며 마음결을 고르게 한다.

선운사 만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에 감기는 폭닥한 낙엽과 포실한 흙의 감촉에 마음까지 한결 가벼워지고, 어깨동무 하듯 도솔천을 따라 나란히 이어지는 황토빛 고운 토담은 어느새 다정한 길동무인양 천왕문까지 동행을 한다.

슬핏, 여릿한 산바람 한줄기가 불어오고 오색의 단풍으로 수려하게 치장한 채 엽락의 찰나를 기다리던 붉고 노란 잎새들이 소란스럽게 색색의 낙엽비를 쏟아댄다. 부지불식 벌어지는 낙엽들의 황홀한 군무와 현란한 잎새들의 향연에 울렁증이 일며 외마디 탄성이 터졌다.

오호라! 선운사의 가을은 낙엽들의 하생으로 수미산 한 자락을 살며시 잇대어 놓았구나. 그러나 곧이어 도솔천의 만추는 또 하나의 비경을 잇대어 열었다. 갑자기 사위가 어둑해지는가 싶더니 구름이 도솔산 허리춤에 걸리면서 새하얀 눈송이가 난분분하게 춤사위를 펼친다.

너울대는 하얀 눈송이와 만추 도솔산이 어우러져 한폭의 진경산수화로 그려지고, 도솔천을 걷던 이들은 선운사의 가을에 넋을 놓은 채 하염없이 만취했다. 그리고 도솔천에서 맞은 선경 같은 선운사의 가을 정취에 이미 제대로 도솔의 진수를 보았노라며 한껏 달아오른 마음은 걸음을 저만치 앞서 내달린다.

선운사 경내 출입문인 천왕문 돌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어디서 날아왔을까. 동백꽃을 대신 해 마중이라도 나온 양 새빨간 단풍잎 한장이 팔랑 내려앉더니 또르르 문루를 지나 선운사 마당으로 구른다.

선운사 대웅보전 뜰의 연등
구르는 나뭇잎을 쫓아 천왕문 문지방을 넘자 만세루를 비롯한 선운사의 전각들이 한눈에 잡힌다. 평평한 평지에 세워진 전각들은 미륵신앙, 즉 중생들에게 차별 없이 부처의 은덕을 베푼다는 평등의 공간을 의미 한다는데 이렇게 선운사는 창건설화부터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너른 마당보다 더 넓고 깊은 선운사가 지닌 뜻에 설렁설렁 내딛던 걸음새를 여미며 만세루로 향한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53호인 만세루는 고려시대에 건축됐다. 700년의 시간을 지탱해 온 두개의 기둥을 비롯해 자연 형상 그대로의 나무를 대들보와 기둥으로 사용해 조화와 균형을 이룬 자연미의 웅장함과 소박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특히 만세루는 강당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후면이 대웅보전으로 향해 있으며 중앙에는 제단까지 마련되어 만세루의 마루에서 대웅보전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을 향해 향을 올릴 수도 있었다. 이는 미륵세상, 평등의 세상을 향한 대중들의 열망을 집회를 통해 소통과 열림으로 실현코자 했던 아름답고 감동스런 의미가 깃든 실용적인 공간이다.

현재 다실로 사용하는 만세루 마루를 공양주는 종종걸음으로 오가며, 찾아 온 이들에게 몸을 데우고 마음에 향기를 전할 차를 준비하느라 부지런히 다구를 정리하고 찻물을 데운다.

만세루의 차 한잔이 간절했지만 풀썩 안으로 들 용기가 없어 마루 끝에 앉아 대웅보전 뜰에 활짝 핀 연등꽃으로 차향의 아쉬움과 달려드는 한기를 달랬다.

침침한 하늘을 가린 화사한 연등 행렬이 바람결에 일렁일 때면 꽃술처럼 매달린 축원지들의 떨림이 파르륵 파르륵 맑은 울림으로 쏟아지며 마당 한가득 바람꽃을 피운다.

아하! 선운사의 가을 끝자락에는 뒤뜰의 붉은 동백꽃 대신 마당에 걸린 연등의 맑은 바람꽃이 대웅보전 뜰을 밝히나 보다. 행여 연등꽃이 다칠세라 조심스레 대웅보전 앞으로 다가갔다.

건축물로서 기품 있고 아름다운 자태와 '대웅보전'이란 편액과 삼불회도로 유명한 선운사의 본전 대웅보전.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현재의 건물은 광해군 때 지어진 것으로 막돌로 쌓은 얕은 기단 위에 또 막돌로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운, 만세루와 같은 자연목을 이용한 건축물이다.

조선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자랑하며, 거하지 않은 규모임에도 화려한 공포와 겹처마가 멋지게 어우러진 모습은 절로 감탄사를 터뜨리게 한다.

덧붙여 유유한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낸 빛바랜 단청은 대웅보전의 청아함을 도드라지게 하고, 간결한 빗살 창호는 대웅보전의 단아함을 더욱 빛나게 한다. 대웅보전은 숨겨진 보물, 탱화가 아닌 벽화로 그려진 삼불회도가 봉안돼 있는 귀중한 국가보물(제290호)이다.

대웅보전을 비켜나 뒤편 언덕을 향해 시선이 달음박질한다. 500살 동백나무숲을 보려는 급한 마음 앞에 걸음은 더디기만 하고 철 이르게 날리는 눈송이와 갈수록 거세지는 바람이 매서운 한기로 돌변하니 선운사 동백꽃을 보려는 갈급함은 더욱 진해진다. 그러나 내달리듯 달려간 대웅보전 뒤뜰의 동백숲에는 당연히 동백꽃이 피지 않았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들여다보지만 붉은 꽃 대신 짙푸른 무성한 잎새들만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워 올릴 꽃망울을 깊숙이 묻은 채 덤덤하다. 하마 어찌 피지 않은 동백꽃을 만추의 하늘아래서 찾아대며 만나지 못했다고 서운타 할까.

하얗게 춘설이 내리치는 어느 날, 선운사 대웅보전 뒤뜰에 붉디붉은 수를 놓을 동백꽃과 눈앞을 어지러이 팔랑대며 날아다닐 동박새와의 해후를 약속하며 짙푸른 동백숲을 떠났다.

눈송이들은 점점 부풀고 바람이 거세지니 서둘러 선운사의 나머지 부속 건물들을 돈다. 1장육척의 거대한 목조 불상을 위해 애초에는 2층 전각으로 지어졌다 이후 단층으로 중수되었다는 장육전, 즉 지금의 영산전과, 원래는 지장전과 시왕전으로 나눠 있던 것을 17세기 이후부터 하나로 결합했다는 명부전을 촉박한 시간을 핑계 삼아 지나쳤다.

그리고는 누구나 숨죽여가며 살며시 안을 들여다 보는 호기심의 장소인 승가대학에 마지막으로 발길을 멈췄다. 곧 동안거가 시작되면 산사의 하얀 겨울은 미륵보살로 현신코자 용맹정진하는 스님들의 낭낭한 독경소리가 담장을 넘고 수행 중이란 푯말이 내걸릴 것이다.

그때다. 문득 어디선가 고요한 사위를 가르는 맑고 청량한 물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이내 시선은 출처를 쫓아 두리번거리고 걸음은 어느새 마당으로 내려섰다. 모두가 침잠 중이건만 졸졸, 또르륵, 여전히 흐름을 유지하며 생기를 지키는 돌수구가 반갑다. 냉큼 물 한잔을 떠는데, 곁에서 해사한 꽃그늘을 드리웠을 배롱나무가 이제는 바싹 말라 가벼워진 나뭇잎을 소복소복 소리 없이 내려놓는다.

그렇게 낭창하게 휘적휘적 선운사 경내를 돌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 다시 천왕문 앞이다. 도솔천이 바라보이는 담장 위에는 수많은 돌탑들이 담장을 따라 이어져 있다.

너나없이 선운사를 떠나는 아쉬움과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미련을 작은 돌멩이에 담아 올렸나보다. 그러나 선운사를 찾아 들 때의 설렘보다 선운사에서 얻은 만추의 감흥으로 충만해진 마음이 등을 떠민다. 아마도 반드시 다시 찾아 올 선운사임을 마음은 알고 있었나 보다.

작별인사를 하려고 돌아 본 선운사 마당의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긴 빨간 감이 풍성하다. 겨우내 달콤한 홍시감을 먹을 수 있는 까치에겐 이미 이 선운사 앞이 미륵의 세상이 아닐런지.



글ㆍ사진 양지혜 여행작가 aikuc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