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서 발등까지 털로 뒤덮는 스타일 인기예감… 페이크 퍼, 과장, 키치함 키워드로 변주

겨울 기상 예보에 늘 등장하는 살벌한 표현들 - 동장군의 호령, 올 들어 가장 추운, 기상 관측 이래 최저 온도 - 에 이어, 지난 겨울에는 새로운 용어가 하나 더 추가됐다.

어떤 강력한 수식보다 더 뼈를 시리게 만든 그 단어는 바로 '소 빙하기'.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사람들은 과연 온난화 걱정을 계속 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정말로 빙하기가 다시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3월 9일 파리에서 열린 2010 F/W 샤넬 패션쇼에서 칼 라거펠트는 소 빙하기에 대한 완벽한 솔루션을 보여줬다. 녹아가는 북극을 형상화한 무대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공수한 진짜 빙산이 가득했고 온 몸을 털로 뒤덮은 바야바들의 등장으로 쇼가 시작됐다.

털 코트, 털 바지, 털 치마, 털 부츠, 털 가방. 집요하리만치 꼼꼼하게 몸을 뒤덮은 털들은 그 볼륨이나 빈번도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쇼의 주인공이었다.

그 중 특히 눈에 띈 것은 부츠로, 일반 부츠에 모피가 살짝 장식된 정도가 아닌 북극곰의 앞발을 신은 것 같은 거대한 털 부츠가 짧은 팬츠와 드레스 아래 훤히 드러난 다리를 든든하게 감쌌다.

오사카 신사이바시
뒤축에 얼음 조각처럼 투명한 굽이 달린 이 북실북실한 부츠는 점점 녹아가는 얼음 무대에 젖어 들어가면서 정말로 북극의 설원을 돌아다니는 곰발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충격과 공포의 바야바 부츠는 그저 단순히 쇼 피스겠거니 하는 생각을 뒤엎고 지난 11월 중순 오사카 최대의 쇼핑거리 신사이바시에서 목격됐다. 당시 한낮의 기온은 15~17도. 오사카의 아가씨들은 초봄에 가까운 날씨에 무릎부터 발등까지 털로 뒤덮인 퍼 부츠에 핫 팬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지난 해부터 겨울 유행의 중심에 섰던 모피가 올해 최정점을 찍었다. 올 겨울 모피 트렌드는 과용, 과장, 그리고 페이크 퍼다.

북슬북슬 포근포근, 퍼 부츠가 뜬다

"모피는 최고의 오브제다. 사진가라면 누구나 모피를 찍고 싶어한다."

샤넬 2010 F/W 컬렉션
사진작가 김현성은 모피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소 안타깝게 이야기했다. 그가 패션의 이름으로 목숨을 잃는 동물들을 안타까워해, 동물과 환경 보호를 주제로 한 1인 잡지 <오, 보이>를 만든 지는 1년 정도 됐다. 그러나 이번 겨울을 지배할 모피 트렌드는 다행히도 그의 걱정을 빗겨간다. 페이크 퍼, 인조 모피가 이번 트렌드의 주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샤넬 패션쇼 무대에 오른 모피는 전부 페이크 퍼였으며, 신사이바시의 신발 가게에 놓인 퍼 부츠 역시 인조 모피가 대세였다.

모피의 매력은 역시 유한 마담 같은 부유함이지만 페이크 퍼가 몰고 온 털의 매력은 다른 데 있다. 잘 빗어 놓은 포메라니언의 보송보송한 털 대신 며칠 안 감은 삽살개의 그것처럼 떡이 되어 뭉친 거칠거칠한 털도 모피의 아름다움 중 하나로 당당히 등극한 것이다.

신사이바시에서 발견한 퍼 부츠들에는 밍크처럼 보송한 털도 있었지만 너구리 털처럼 적당히 캐주얼하고 풍성한 털, 그리고 개털처럼 손으로 꽉꽉 눌러 잡은 것 같은 노골적인 싸구려 모피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색깔도 브라운 일색에서 탈피해 너무 하얘서 천박하기까지 한 화이트, '나 가짜예요' 라고 외치는 듯한 꽃분홍, 요즘 한창 유행 중인 레오파드 프린트 등 페이크 퍼로 구현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외관을 거침 없이 시도한다.

물론 페이크 퍼로도 얼마든지 리얼 퍼의 고급스러움을 재현할 수 있다. 실제로 샤넬 쇼에 등장한 모피들은 페이크 퍼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럭셔리했다. 그러나 최근 보이는 페이크 퍼는 리얼 퍼의 외관을 따라 잡기 위해 굳이 허덕이지 않는다. 리얼 퍼가 줄 수 없는 가벼움, 캐주얼함, 키치함, 싸구려스러움을 만끽하는 것이 지금 페이크 퍼를 대하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다.

가짜 모피의 키치한 매력을 그대로 살려 올해 유행하는 퍼 부츠에는 과장과 장난끼가 가득하다. 일단 그 볼륨을 보면, 짧게 깎아 윤기가 흐르는 모피보다는 최대한 몸집을 부풀릴 수 있는 길고 거친 털이 대세다. 샤넬은 코트와 가방에는 짧은 모피를 쓰는 대신 부츠에는 한결 같이 야성적이고 터프한 느낌의 긴 털을 사용했다.

털이 차지하는 면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올 겨울이 그 정점인 듯 하다. 입구만 살짝 털로 장식한 퍼 부츠로는 감히 트렌드에 동참했다고 말도 꺼낼 수 없을 정도다.

발 부분을 제외한 몸통이 전부 털로 덮인 부츠 정도는 신어줘야 겨우 대화에 낄 수 있는데, 가죽 끈으로 모피를 꽁꽁 묶어 에스키모처럼 보이는 부츠, 모피를 레오파드 무늬로 염색한 부츠, 신발 위에 털 토시를 따로 신은 것처럼 모피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주름이 지는 스타일 등 종류도 다양하다.

최종 단계는 아예 부츠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면을 덮어버린 설인(雪人) 스타일의 털 뭉치 부츠다. 그냥 털로 만든 원통을 신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이 신발은 거리에 나갔을 경우 가장 뜨거운 눈길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위에 퍼 코트까지 받쳐 입어 테마파크의 캐릭터 인형이 되든지, 무톤 재킷, 짧은 가죽 팬츠 등을 활용해 최대한 진지하게 접근하든지 본인의 자유다. 허벅지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 한 가지만 지켜지면 이 장난스런 신발도 그다지 소화하기 어려운 건 아니다.

이미 몇몇 인터넷 쇼핑몰과 보세 신발 가게에 북슬북슬한 털들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명동 거리 한복판에도 바야바들이 나타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어그 부츠에 치를 떨었던 남자라면 올 겨울에는 아예 눈을 감고 다녀야 할 듯. 그러나 매 겨울 매서운 칼바람을 감내해야 했던 패션 피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 겨울에는 지난해 같은 장기 한파는 없을 전망이라지만 아침 기온이 영하 15도로 뚝 떨어진 어느 날, 바야바 부츠는 가장 기능적이고 트렌디한 액세서리로 사랑 받을 것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