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잔에 물과 희석 후 향 맡고 음식과 함께 천천히 음미

"가벼워서 오래 달릴 수 있잖아, 부담 없어서 한 방에 안 가잖아"

부드럽게 술술 넘어간다는 저도주가 인기다. 와인과 사케, 막걸리가 차례로 시장을 휩쓸었고, 독한 술의 대명사 격인 소주도 16도의 벽을 깼다. 연말 술자리를 상쾌하게 나누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인데 어쩐지 좀 석연찮다.

원래 증류주인 소주는 95도 이상의 주정에 물을 섞어 희석해서 만드는데 기존 소주에 물만 더 넣은 것이 아닌가. 소비자가 섞어도 될 물을 미리 섞어버렸으니 부피는 늘고, 목표하는 취기에 도달하려면 배가 터질 때까지 마셔야 한다.

아무리 만취하는 한국 술문화가 지탄의 대상이라고 해도 취하지 않는 술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야말로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한 요즘 술들을 보고 있자면 새삼 독주가 그리워진다.

그 중에서도 알코올 도수 40도 이상의 위스키는 그 복합적인 향과 맛, 풍부한 활용도로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로 불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접대 문화와 강압적인 음주 문화에 짓눌려 사람을 '보내버리는' 술로 여전히 거칠게 소비되고 있다.

마침 디아지오 코리아의 시니어 앰배서더 장동은 씨가 스카치 위스키 이야기를 집대성한 <스카치 위스키 바이블>을 냈다. 제대로 마시고 제대로 취하게 해주는 위스키의 세계로 가보자.

한국은 위스키 천국?

"요즘 주변에서 6년 산 위스키 본 적 있으세요?"

장동은 씨의 질문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6년 산도 위스키냐고.

"국내에서 소비되는 위스키의 연산은 점점 더 올라가고 있어요. 처음엔 6년, 그 다음엔 12년, 17년, 19년, 21년. 요즘엔 아예 6년 산은 찾아볼 수도 없게 됐죠. 한국이 위스키를 소비하는 분위기가 지극히 과시적이기 때문이에요."

위스키가 있는 곳에는 주로 사회생활에 진이 다 빠진 샐러리맨들이 함께 한다. 어둠침침한 룸살롱 테이블 위에 황금빛 양주가 등장하면 그제야 제대로 접대받았다는 안도감에 흐뭇한 웃음이 오고 간다. 그리고는 맥주와 섞어 급하게 들이켜고, 그대로 녹다운되는 것이 정해진 수순. 하지만 그렇게 마시기에 위스키는 진정 아까운 술이다.

"위스키의 성분은 물과 알코올이에요. 알코올 도수가 40도인 위스키의 경우 59%가 물이고, 알코올이 40%, 에스테르와 알데히드, 기타 물질로 구성된 나머지 1%가 위스키의 풍미를 결정하죠. 몇 만 원짜리 위스키와 수백 만 원짜리 위스키의 차이는 이 1%가 좌우해요. 그런데 여기에 맥주를 섞어 버리면 그냥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위스키가 되는 거예요. 백 만 원짜리 명품 백은 한 번 사면 계속 활용할 수 있기라도 하지만 위스키는 몇 시간 안에 다 마셔 없어 버리는 사치품인데 그 가치를 모르고 마시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요?"

한국은 세계 10위 안에 드는 위스키 소비국으로 17년산 위스키로만 따지면 세계 최대 규모의 시장을 자랑한다. 소비하는 위스키의 수준은 높지만 그에 대한 지식과 마시는 태도는 거칠고 남루하기 짝이 없다.

장동은 씨가 조언하는 것은 싸거나 숙성 연도가 짧은 위스키라고 해서 품질이 낮다는 편견은 버릴 것, 가볍고 섬세한 스타일로 시작해 점점 풍부하고 스모키한 스타일로 옮길 것, 그리고 폭탄주로 마시고 싶을 경우 슈퍼 프리미엄급 위스키(17년 이상 숙성된 원액을 사용한 최고급 위스키) 말고 스탠다드 위스키(대개 4~7년도의 숙성도로 가격이 저렴하며 대중적인 위스키)를 활용할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위스키 제대로 즐기는 법.

"훌쩍보다는 홀짝" - 위스키 전용잔

"위스키가 앰프라면 잔은 스피커라고 생각하면 돼요. 잔에 투자하세요. 샷 잔에 담는지, 종이컵에 담는지, 전용잔에 담는지에 따라 위스키의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와인은 물론이고 샴페인, 코냑, 요즘에는 맥주도 원래의 맛과 향을 즐기기 위해 전용잔을 사용한다. 아래가 볼록하고 위로 올라 갈수록 천천히 좁아지다가 맨 위에서는 나팔꽃처럼 활짝 벌어지는 몰트 위스키 잔은 스트레이트 잔보다 훨씬 용량이 크다.

한 번에 훌쩍 들이키지 말라는 뜻이다. 벌어진 잔 주둥이에 입술을 대면 맞춘 듯이 달라 붙는데, 이 잔에 위스키를 따른 후 색을 감상하고 잔을 살살 흔들면서 향을 느끼다가 혀를 이용해 조금씩 맛을 음미하며 홀짝홀짝 마시는 것이 좋다.

"응축된 향 깨우기" - 희석을 위한 물

위스키 옆에는 늘 물이 있어야 한다. 위스키에 물을 살짝 넣으면 물과 알코올 분자가 서로 충돌하며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는데 이 과정에서 단단하게 응축된 위스키의 복잡한 향이 열리게 된다. 게다가 알코올 도수도 떨어져 한결 쉽게 마실 수 있다.

호스트로 손님들에게 위스키를 서브할 경우 위스키 잔 옆에는 입을 헹구거나 희석하는 데 사용할 탄산 없는 생수를 같이 놓는 것이 좋다. 물로 적절하게 희석된 위스키는 실제로 와인 한 잔을 마시는 것보다 적은 알코올 양을 흡수하게 된다.

"이제는 몰트 & 다이닝" - 곁들이 음식

원래 위스키에는 요리를 곁들이지 않는 것이 전통이지만 최근에는 몰트 & 다이닝(malt & dining)이라고 해서 와인 & 다이닝처럼 몰트 위스키와 음식을 매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위스키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모임에서는 달콤한 초콜릿 타르트에 이가 시릴 정도로 차게 얼린 달위니를 함께 마시면 초콜릿의 풍부한 맛을 배로 즐길 수 있다. 남자들끼리 모일 경우 스모키한 풍미의 탈리스커에 훈제 연어, 또는 묵직하고 강렬한 느낌의 라가불린에 크리미하고 짭짤한 블루치즈를 매치하면 위스키의 여운을 한층 오래 즐길 수 있다.

싱글 몰트 위스키란?

국내 위스키 문화의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싱글 몰트 위스키 시장의 확대다. 싱글 몰트 위스키란 하나의 증류소에서 물과 보리만을 사용해 증류한 위스키다.

보리로 만든 몰트 위스키와 잡곡으로 만든 곡물 위스키를 섞은 블렌디드 위스키가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맛을 지닌 반면, 싱글 몰트 위스키는 초보자들은 진저리를 칠 정도로 마니악한 향과 맛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체 위스키 중 5% 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위스키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높아지면서 최근 국내에도 싱글 몰트 위스키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고유의 향을 즐기기 위해 다른 술은 물론이고 물도 섞어 마시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청담동 커피바 케이(02-516-1970): 일본에 본점이 있는 커피바 케이에서는 20여 종의 희귀한 싱글 몰트 위스키, 그리고 와인, 블렌디드 위스키를 판매한다. 잔으로도 마실 수 있다.

신라호텔 더라이브러리(02-2230-3388): 100여 종의 싱글 몰트 위스키를 보유한 국내 최대 규모의 위스키 바.

강남구청역 근처 오프(02-516-6201): 일본 몰트 위스키를 포함한 다양한 싱글 몰트 위스키를 잔으로 마실 수 있는 곳. 맥주도 판매한다.

신천 미스터 사이먼바(02-415-6108): 신천에서 가장 큰 몰트 위스키 바. 잘 녹지 않는 얼음을 만드는 아이스볼 제조기가 있어 향을 해치지 않고도 차가운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마실 수 있다.

* 사진 출처: <스카치 위스키 바이블>, 장동은 저, 워크컴퍼니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