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 쿠스트 바르셀로나… 정열적 색채, 유머와 철학으로 관심 집중

하이메 아욘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 세계 4대 패션 도시에서 나만의 패션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유망한 신인 디자이너들이 등장하기에는 거물들이 너무나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이때 나의 대안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그리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다." – 채건호

당신에게 스페인은 어떤 나라인가. 나만의 패션을 찾을 수 있는 나라? 천재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가 있는 미식 천국? 골목골목 가우디의 혼이 서린 예술의 나라? 아니면 아직도 그냥 투우의 나라인가?

이미 목까지 차 오른 스페인 물결

패션에 있어서 스페인이 우리가 새롭게 발견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스페인은 이미 제 발로 우리 곁에, 아니 이미 우리 옷장 속으로 들어와 있다.

편한 착용감 때문에 엄마가 주야장천 신고 다니는 캠퍼 신발, 시즌 세일이 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가는 자라 매장, <섹스앤더시티>의 러브 스토리를 서울에서 재현해 줄 것 같은 마놀로 블라닉 구두는 모두 스페인 출신이다.

데시구엘
이들 외에도 망고, , 스프링필드, 발렌시아가, 로에베 등 한국의 거리와 백화점, 쇼핑몰 중 스페인의 입김이 끼치지 않은 곳은 없다.

자라를 소유한 스페인 최대의 패션 기업 인디텍스는 12월 초 가로수길과 강남역에 의 매장을 냈고, 내년에는 역시 자사 브랜드인 베르슈카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론칭을 고려 중이다.

여기에 인디텍스 다음으로 큰 기업인 코르테피엘이 과 스프링필드에 이어 코르테피엘의 론칭을 확정지었고 현대 백화점도 스페인 중견 디자이너 아돌프 도밍게스의 도입을 추진 중이라고 하니, 올해에 이어 내년 한국 패션계에는 스페인 발 강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자라가 스페인 브랜드임을 알고 나서 자라 매장 어딘가에서 플라멩코와 투우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계 최대의 SPA 브랜드 자라의 모토는 '어제 패션쇼에 선 옷을 오늘 매장에서 만난다'로, 기실 인디텍스의 핵심 경영전략은 카피다.

300명의 디자이너들은 매 시즌 유행 경향을 모두 취합해 한 해에 3만개 이상의 디자인을 쏟아내며 고객의 취향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물 샐 틈 없는 수비를 펼친다.

마시모 두띠
어쩌다 놓친 부분이 있다면 실시간으로 수정한다. 당신이 자라 매장에 들어가 니트를 하나 집어 들었다가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내려 놓았고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그를 지켜보고 있는 숍 매니저가 귀신 같이 눈치 채 스페인 본사에 전화를 걸 것이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는 그 니트의 물량이 대폭 줄거나 다시는 매장에서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소비자 반응이 절대 우선이다 보니 자라에서 찾을 수 있는 스페인적 DNA란 그들의 조상이 가진 타 대륙 진출에 대한 탁월한 감각 정도다.

그들이 무적함대를 내세워 다른 나라들을 집어 삼켰다면 그 후손들은 철저한 고객취향우선주의를 무기로 전 세계 77개 국에 4780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자라뿐 아니라 망고, 스프링필드, , 이번에 론칭한 도 모두 SPA로 여러 나라에 매장을 가진 글로벌 브랜드다. 스페인에는 왜 이렇게 SPA 브랜드들이 많을까?

"스페인은 패션 강국인 프랑스, 이탈리아에 밀려 오랫동안 2군이었습니다. 독자적 브랜드를 가지기 보다는 생산 기지 역할이 주였죠. 1군을 이길 수 있는 전략은 저렴한 가격뿐이었습니다. 명품의 디자인을 카피하면서도 가격을 싸게 한다면 사지 않을 사람이 없죠. 스페인 발 SPA 브랜드들이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텍스타일과 생산에 대한 오랜 노하우가 이것들을 가능하게 해줬죠."

스프링필드와 을 전개하는 제이케이파트너스 박진기 대표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스페인다운 패션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피카소와 후안 미로, 달리, 가우디의 나라. 유럽 어느 나라 못지 않은 예술적 배경과 자부심을 가진 스페인이 패션에 있어서만은 고객 만족을 외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우먼 시크릿
지중해의 빛과 불, 스페인의 패션

"현재 스페인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디자이너들은 스페인적 색깔이 강한 브랜드예요. 만약 가 아르마니 같은 디자인을 했다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최근 안그라픽스에서 펴낸 <스페인 디자인 여행>의 저자 유혜영 교수의 말이다. 그는 현재 스페인에 거주하며 그래픽 디자인, 제품 디자인, 일러스트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 중이다.

"피카소와 미로, 달리의 작품은 모두 원색적이고 화려한 특징이 있어요. 지중해의 강한 햇볕과 색채, 축제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죠. 이런 것들이 당연히 패션으로도 이어지고 있어요."

는 쿠스토와 데이빗, 두 형제가 오토바이 세계일주를 마친 후 만든 브랜드로, 직접 그린 야성적이고 오색찬란한 일러스트 티셔츠가 대표적이다.

조르디 라반다
1997년 뉴욕패션위크에 진출, 밋밋한 뉴욕 패션에 이글대는 지중해의 열기를 불어 넣으며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그들은 몇 년 전 한국에도 매장을 낸 적이 있다. 순식간에 동대문에 카피 제품이 깔리는 바람에 지금은 철수하고 없지만 스페인 현지에서는 여전히 가장 좋은 목에 매장을 가지고 있으며, 불황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매장을 늘리는 몇 안 되는 브랜드 중 하나다.

스페인의 천재 일러스트레이터로 불리며 국내에도 상당수의 팬을 보유한 는 의 오리지널 멤버다. 남자가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선에 밝은 색감, 감각적인 인물 묘사 등으로 그는 한 때 보그, 엘르 등 패션 잡지의 지면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국내 론칭했다가 중단한 역시 화려한 컬러와 그래픽, 독특한 패브릭의 조합으로 스페인 패션을 대표한다. 한때 와 표절 시비가 붙을 정도로 콘셉트가 비슷한 이 표방하는 것은 행복이다.

10시 반쯤 느긋하게 출근해 일하다가 2시부터 시작되는 풍성한 3코스 정찬, 그리고 5시까지 이어지는 황홀한 시에스타는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들은 퇴근 후에도 칼 같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저기 타파를 파는 바를 기웃거리며 저녁 늦게까지 큰 소리로 떠들고 즐거워한다. 타파는 바게트 빵 위에 하몽이나 정어리 등을 얹은 간단한 안주 거리인데, 보통 9시를 훌쩍 넘겨 시작하는 저녁 식사 전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는 음식이다.

쿠스토 바르셀로나
평일에도 이 정도니 주말에는 당연히 10~11시에 저녁을 먹기 시작해 자정까지 정열적이고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컬러와 낙관적인 개념이 필요하다"고 말한 의 CEO 마넬 아델에 따르면 스페인 인들에게 있어서 행복과 색채는 동일한 개념이다.

유머, 실용, 철학, 스페인의 정신

알록달록한 색채에 대한 호불호는 나라마다 극명하게 갈리는 편이다. 스페인 디자인이 국제적으로 먹히는 이유는 강한 색채 외에도 그 안에 들어있는 유머와 철학 때문이다.

"심플하면서도 구석구석 작은 아이디어가 반짝이고 일반적으로 유머러스해요. 위트는 이탈리아 디자인에서도 보여지지만 그들이 다분히 장식적이고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반면 스페인 디자인은 자기 스스로 즐기기 위한 것들이 많아요. 자신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제품에 개성과 철학이 분명하게 드러나죠."

이런 특징들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슈즈 브랜드 캠퍼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30년 전 마요르카 섬에서 탄생해 4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브랜드 캠퍼의 철학은 '신발이란 발을 편안하고 건강하게 보호해야 하며, 자연과도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 캠퍼 시리즈 중 카멜레온은 폐타이어를 삼마 소재의 실로 손박음질해 만든 제품으로, 제품을 구입하면 오래된 신문지로 포장해 준다.

와비 시리즈는 '사과하다'라는 뜻의 일본어 '와비루'에서 따온 이름으로 자연에 대한 감사와 존경, 그리고 사과를 의미한다. 보통 신발 하나를 만드는 데 10여 개의 조각이 필요한 반면 와비는 조각이 필요 없다.

공정도 달랑 3단계로, 고무 재질을 재활용해서 만든다. 복합적이지만 단순한 디자인, 수공예와 첨단 기술로 완성한 견고한 품질, 다양한 색상, 일관된 철학을 고수하는 캠퍼는 스페인 디자인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 시즌 '캠퍼 투게더'라는 이름으로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며 아이디어를 수혈해온 캠퍼는 올 하반기 4명의 디자이너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했는데 그 중 은 현재 스페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제품 디자이너다.

1974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그는 자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트렌드 세터들의 주목을 받으며 스페인의 컨템포러리한 감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고독하고, 다채로우면서도 미니멀한 의 작품은 동양과 서양, 또는 과거와 미래 같은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어 더욱 매력적이다. 그는 캠퍼와의 작업에서 여성용 슈즈에 유럽 앤티크 테이블의 다리를 본 딴 굽을 달아 바로크 시대와 현대를 기발하게 조화시켰다.

약 3년 전부터 국내에서는 스페인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유혜영 교수는 최근 스페인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준비 중인 학생들의 문의가 부쩍 늘었다고 말한다.

"5년 전쯤 스페인 디자인이 건축, 패션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킨 적이 있어요. 이제 그 관심이 대중으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어요. 국내에는 더더구나 알려진 것이 없었죠. 스페인과 한국은 거리상으로도 너무 멀고 스페인 디자인은 아직 주류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기 때문에 더 주목을 받는 것 같아요. 내년에 국내에 스페인 브랜드들이 론칭되고 나면 관심은 더 커지지 않을까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