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 대신 기능, 패딩 부츠, 야상 등 편한 패션 유행

몇 년 전, 처음 어그 부츠가 등장했을 때 반응은 '어머, 흉물스러워라'였다.

부숭부숭한 털에 '엣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 당장이라도 신고 노동일선에 뛰어 들어야 할 듯한, 눈 쌓인 핀란드 숲에서 장작 팰 때나 북극에서 얼음 깰 때 외에는 신을 일이 없을 것 같은 투박한 신발. 설마 이게 유행할까 했지만 헐리우드 스타들의 파파라치 샷은 또 한번 기적을 발휘해 어느 새 한국의 패션 거리에서 물리도록 구경하게 됐다.

지난해 여름을 강타한 상품은 레인 부츠였다. 비 올 때 발과 바지 밑단을 보호하기 위한 고무 소재의 신발 즉 장화로서, 그 전까지 패션계에서 장화의 위상은 몸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복장 규제가 덜한 회사에서 헌터의 검은색 고무 부츠를 청바지에 받쳐 입고 출근한 여직원들은 남자 직원들로부터 한 마디씩 들어야 했다.

"퇴근하고 모내기나 하러 갈까?" "아니, 수산 시장엘 먼저 가야지."

그러나 가을엔 야상 점퍼, 이어 겨울에는 패딩 부츠가 최고의 아이템으로 떠오르면서 이상 기운이 감지됐다. 패션의 핵심 개념인 '희생'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능'이 들어선 것. 이제 멋 부리다 얼어 죽는 건 옛말이 된 걸까?

어그부츠
이지~이지~ 편하게 가자구요

"It's interesting how Korean women have the ability to wear mini-skirts in any weather."

패딩 부츠의 유행 원인에 "날이 추워서" "눈에도 젖지 않으니까"라는 답변은 왠지 부족하다. 여자들의 미에 대한 집착은 추위 따위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한국의 길거리 패션을 찍어 기록하는 마이클 허트 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지난 12월 신촌 거리를 걷는 한 여성의 사진을 올리며, '손톱이 어디 붙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추운 날씨'에 허벅지를 드러내는 한국 여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제 아무리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곤두박질쳐도 차라리 집에서 안 나가면 안 나갔지, 멋과 보온을 맞바꾸는 것은 패션 피플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경우 멋과 기능은 항상 대치 상태에 있었다. 이는 비단 한국뿐이 아니라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패션의 잔혹성을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대표적인 아이템으로 이 있다. 가슴에서 허리, 엉덩이까지,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선을 강조하기 위한 이 몸매 보정기구는 역사상 가장 잔인한 패션으로 꼽힌다.

옥스퍼드 슈즈
배로 숨을 쉴 수가 없어 여자들은 흉식 호흡만 해야 했고 임신한 여자들은 출산 후에도 계속 을 입는 바람에 가슴이 변형돼 아이에게 젖을 못 먹일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간이 둘로 나누어지고 온 몸의 장기가 위치를 이탈해 죽은 여자가 나온 후에도 유행은 한동안 지속됐다. 가느다란 허리가 섹스어필의 핵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 펑퍼짐한 허리는 여자로서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아름다움을 위해 어린 여자 아이를 발 병신으로 만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가체 역시 목뼈를 부러뜨릴 정도로 무겁다. 체감 무게가 20kg 이상인 가체에 대해 배우 배종옥 씨는 "초등학생 한 명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할 정도. 가장 최근의 잔혹사는 킬 힐이 썼다.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킬 힐의 기준은 대략 11cm부터다. 슈콤마보니의 디자이너 이보현 씨는 "11cm 아래로는 그냥 하이힐, 그 위로는 킬 힐"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여성의 위상과 자신감이 드높아지다 못해 폭발한 킬 힐 역시 무지외반증, 척추질환, 관절염을 유발하는 무서운 아이템이다.

패션에는 늘 희생이 따른다는 공식은, 그러나 역사를 통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신사화 중 가장 격식 있는 옥스퍼드 구두도 처음에는 간편함의 상징이었다. 17세기 영국 옥스퍼드 대학생들로부터 유래한 이 신발은 끈으로 묶도록 되어 있고 앞 코에는 구멍 뚫린 장식이 있는데, 그 구멍 역시 비가 왔을 때 신발 속으로 들어온 물기를 쉽게 빼기 위한 기능적 성격이 강했다.

코르셋
프랑스인들이 은 버클을 버리고 구두 끈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좀 더 '민주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1785~1789년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그들의 혁명 정신에 고취돼 옥스퍼드화를 신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에서 대유행하게 되었다.

불편함과 요란함을 경멸하다

'민주적'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그 말이 패션계에 들어온 이상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단순함과 기능성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패션의 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은 코코 샤넬이다.

현재 샤넬 수트는 상류층 며느리들의 부유함과 조신함을 상징할 때 쓰이지만 당시에는 단순하다 못해 빈약한 패션으로 불렸다. 동시대 디자이너이자 샤넬의 라이벌인 폴 푸아레는 그녀의 옷이 잘 팔리는 것에 대해 "옛날 여성들은 배의 아름다운 뱃머리처럼 건축적이었지만, 요즘은 영양실조에 걸린 작은 체구의 전신 기사를 닮았다"고 비난했다.

물론 복잡하고 요란하기 짝이 없던 당시 귀부인들의 드레스와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1931년 저널리스트 자네 플라네는 "샤넬이 빈약한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하녀의 셔츠 칼라와 소매를 우아하게 만들었으며 토목일을 하는 사람들의 스카프를 이용하고 기관사의 작업복을 여왕들에게 입혔다"고 말했다.

패션의 민주화를 선도한 코코 샤넬
그녀는 장신구를 떼어내고 '귀족 티' 내는 것을 비웃었으며 남성복에서 영감을 받아 단순한 옷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이때부터 부유해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의 멋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란한 겉치레가 순수, 절제, 안락이라는 민주적 미학을 위해 사라지게 된 것이다(질 리포베츠키)'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이 수없이 엎치락뒤치락 해온 패션의 역사 속에서도 점점 더 기능적이고 캐주얼한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다.

그 변화에 주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 스포츠 의류다. 골프복으로 입었던 카디건 스웨터는 비즈니스 캐주얼이라는 이름으로 사무실 깊숙이 들어오게 됐고, 여자들이 자전거를 탈 때 입었던 헐렁헐렁한 판탈롱은 스커트보다 더 대중적인 옷이 되었다.

두 다리와 두 팔을 드러낸 원피스는 수영복으로부터, 미니 스커트 역시 하키, 스케이팅, 테니스를 위해 입었던 옷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자연스런 육체를 신성화하는 스포츠, 그 가벼움과 에너지라는 새로운 이상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패션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며 일상으로 급격히 흡수됐다. 이는 1960년대 미술계를 잠식한 미니멀리즘, 그리고 의류 제조 방식의 기계화와 맞물리며 빠르게 진행됐다. 이제 다시 맥시멀리즘이 오더라도 중세의 드레스로 회귀할 일은 없는 것이다.

최근에 온오프 패션계를 달구고 있는 패딩 부츠는 '패션=실용'이라는 흐름의 결정판이다. 내부와 바닥에 깔린 따뜻한 양털, 3cm 내외의 편안한 굽 높이, 겉 면은 발수 발포 재질로 되어 있어 눈 밭에 굴러도 마른 천으로 닦아주기만 하면 관리는 끝이다.

보온성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바닥에는 한기를 차단하고 얼어붙은 길바닥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특수 고무처리까지 되어 있다. 스키장에서나 필요할 정도로 고기능성 아이템이지만 이미 길거리를 점령한 상태다. 어그 부츠를 대표하는 브랜드 '어그(ugg)'처럼 패딩 부츠를 대표하는 브랜드 '러버 덕(rubber duck)'을 판매하는 편집숍 긱샵은 지난 12월 전년 대비 70%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

군대에서 입는 야전 상의에서 비롯된 일명 '야상' 점퍼 역시 작년 가을부터 시작해 보온성을 강화하면서 겨울까지 남녀 모두에게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편한 패션의 유행은 편해서만은 아니다. 그 옷들을 기능이 아닌 패션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디자이너와 패션리더들에 의해, 대중은 스타일에 대한 욕구를 침해받지 않으면서도 편안한 패션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패션이 희생이나 질병이라는 단어와 멀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킬 힐 같은 아이템이 다시 나오지 말란 법이 없지만 인류의 옷 차림이 점점 신체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음은 틀림 없다.

먼 과거, 한 화가가 미래를 주제로 그림을 선보였다. 그림 속에서는 이브닝 수트를 입은 남자와 페티 코트로 부풀린 거대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우산과 비슷한 기구를 이용해 하늘로 둥둥 날아오르고 있었다. 화가는 미래의 옷에 날 수 있는 기능이 부착될 것이라는 꿈 같은 상상을 하면서도, 펄럭거리는 드레스 자락이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드레스와 수트가 일상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 미래의 옷은 어떻게 될까? 새로운 기능의 첨부가 아닌, 너무나 당연시되던 것들의 삭제는 아닐까?

뻣뻣하기만 하고 보온, 보냉 기능은 전혀 없는 청바지? 아무리 비싼 걸 사도 처음 얼마간은 발 뒤꿈치를 까지게 만드는 가죽 구두? 지금 빨리 당신의 몸을 괴롭혔던 패션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라. 21세기의 샤넬이 그것을 제거해줄 것이다.

참고 서적: 신발의 역사, 로리 롤러, 이지북
패션의 제국, 질 리포베츠키, 문예출판사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