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의 옷 (9) 베스트 컬러, 워스트 컬러2008년부터 회색, 베이지, 블랙의 세련된 뉴트럴 컬러 대세

색동 저고리와 오색 비빔밥, 전통 목조건물의 화려한 처마, 태극기를 이루는 청과 홍의 강렬한 콘트라스트. 해외용 홍보 영상에 등장하는 한국은 역동적인 총천연색의 나라다. 그러나 정작 거리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몸에 걸쳐진 옷 색깔은 검정과 흰색, 회색뿐이니, 오방색을 오늘 한국의 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지난해 현대건설이 심혈을 기울인 프로젝트인 '반포 힐 스테이트'는 국내 컬러 연구자들 사이에서 말이 많다. 트리플 역세권의 완벽한 입지 선정, 태양광 발전ㆍ소형 풍력 발전 등 신재생 에너지를 활용한 최첨단 동력 시스템, 여기에 세계적인 색채 디자이너인 장 필립 랑클로 교수가 참여한 외관 디자인까지. 성공할 수밖에 없는 드림팀의 총출동이었지만, 정작 복병은 비싼 디자이너를 불러 들여 엄선한 건물 외관의 색채였다.

랑클로 교수는 빨강, 파랑, 초록 등의 화사한 컬러 바(color bar)로 아파트의 측면을 장식했는데, 유채색의 대담한 사용을 불편하게 여기는 한국인들의 눈에 마뜩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영감을 받은 곳은 불행히도(?) 한국의 단청이었다.

무채색에 대한 끝없는 연정

"한국인이 가장 세련되게 여기는 색 조합은 블랙이나 화이트, 베이지 등의 뉴트럴한 컬러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레드, 블루 등의 강렬한 색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입니다."

출처:www.feetseoul.com, 촬영:마이클 허트
색이 없는 색깔, 무채색은 매해 새롭게 제시되는 트렌드 컬러의 홍수 속에서도 당당히 명맥을 이어왔다. 그 중에서도 검은색에 대한 한민족의 사랑은 진정 특별하다. 국민의 60% 이상이 첫 장만하는 수트의 컬러로 블랙을 선택하겠다고 답했으며, 검은색에 대한 이미지로 '가장 카리스마 있고 고급스러운 색'이라고 답했다.

"잘 어울리니까 좋아하게 되는 거죠."

케엠케 색채연구소 대표이자 국내 컬러리스트 1호인 김민경 소장의 말에 따르면 한 국가의 소울 컬러는 매일 보고 접하는 생활현장에서의 컬러와 개인에게 잘 어울리는 퍼스널 컬러, 두 가지로 나뉜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의 불쾌감과 유쾌감으로 자신의 퍼스널 컬러를 대략 짐작할 수 있는데, 같은 머리색과 같은 피부색, 같은 눈동자색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모노톤의 색채를 잘 소화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피부색에 어울리는 건 파란색, 남색, 와인색의 다소 차가운 계열, 그리고 블랙, 화이트, 그레이의 모노톤이에요. 피부가 창백한 독일이나 영국 디자이너의 옷보다 우리와 피부나 머리 색이 비슷한 프랑스,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국내에서 더 인기를 끄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좀 더 원색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기본은 항상 블랙이죠."

덕분에 한국의 거리에는 색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패션산업이 급성장한 지난 10년간 무채색을 활용하는 대중의 태도는 180도로 바뀌었다.

"이전에 검은색을 입는 이유가 안전하고 소심한 선택의 결과였다면, 이제는 블랙을 이용해 멋을 부릴 줄 알게 됐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예요."

PFIN_퍼스트뷰코리아 서강희 실장의 말이다. 퍼스트뷰코리아는 지난 1999년부터 한국 거리를 걷는 20~30대 남녀의 패션을 촬영해 왔다. 그들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05~2007년과, 2008~2010년에 거리를 물들이는 색은 확연히 달라진다.

분홍, 노랑, 다홍, 하늘색, 보라색 등 유행하는 색이라면 딱히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덥석 사 입은 것이 2005년의 패션이라면, 2008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회색, 베이지, 블랙의 세련된 뉴트럴 컬러가 대세가 됐다.

"이전에는 어떤 색깔이 유행인지, 그 색을 입었는지에 따라 '신경 쓴 패션과 안 쓴 패션'이 갈렸어요. 하지만 이제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중요해졌죠. 모노톤을 기본으로 개성 있게 코디하되 만약 보라색이 유행한다고 하면 양말이나 머플러, 미니 스커트 등의 작은 면적으로 살짝 포인트만 주는 것이 요즘 트렌드예요."

'요즘 멋쟁이 남자들은 분홍색도 입는다며?'라는 말을 듣고 분홍색 피케 티셔츠를 하나 사서 주구장창 입어 젖히며 '나도 패션에 신경 쓰고 있어'라고 생각하던 시대는 갔다는 얘기다. 초록색에 죽고 못산다고 해서 대뜸 녹색 코트를 입어 몸의 3분의 2를 초록색으로 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구하는 분위기에 맞게 초록색의 질감과 면적, 위치를 고려하게 됐다.

치밀하게 계획된 똑똑한 색 사용의 시작은 2008년부터다. 블랙과 그레이, 화이트는 콘크리트 건물에 묻히기 위한 보호색이 아니라 세련되고 시크한 스타일을 위한 기본색으로 거듭났다.

자라와 H&M이 선물한 색

개인의 스타일이 중요해지고, 거리를 휩쓰는 메가 트렌드가 약화되며, 특정 색이 패션의 기준에서 물러난 지금에도 한국인과 상극인 색은 여전히 존재한다. 위의 퍼스널 컬러 개념을 동일하게 적용하자면 '안 어울려서' 한국과 멀어진 색은 주황색, 노랑색, 연두색이다. 그 중에서도 연두색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최악의 컬러로, 서울 거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색이기도 하다.

"서구에서는 노인이라도 샛노란 색이 아주 잘 어울리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색이 어울리려면 피부가 하얗고 머리 색도 아주 밝아야 해요. 그럴 경우에는 연두색이나 오렌지색이 아주 프레시하게 보이죠."

반대로 트렌드와 무관하게 계속 선호되는 색도 존재한다. 맑은 빨강은 노란 피부를 화사하게 보이게 하는 컬러로, 난색 계열이 안 어울리는 동양인에게도 잘 받는다. 지금은 한 물 갔지만 한때 이효리로 인해 크게 유행했던 핫 핑크는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은 아니지만 포인트를 주기에 좋아 애용된다.

안타까운 것은 베이지 색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색임에도 불구하고 처져 보인다거나 나이 들어 보인다는 이유로 계속 외면되어 왔기 때문이다. 김민경 소장은 베이지 색이 블랙 이상으로 만능 컬러라고 말한다.

"눈으로 볼 때 예쁜 색과 입었을 때 예쁜 색이 다른데, 대부분 다른 색깔의 옷과 함께 걸려 있는 경우엔 베이지를 외면하죠. 눈에 띄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베이지 색은 함께 매치되는 색을 고급스럽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블랙을 화이트 대신 베이지와 함께 코디하면 훨씬 더 고급스러워 보여요. 파랑과 베이지, 초록색과 베이지, 회색과 짙은 베이지도 정말 세련돼 보이죠. 그건 입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어요."

무채색을 사랑하게 된 2011년 한국의 패션 신 뒤에는 사실 빅 브라더가 존재한다. 시크하고 중성적인 멋을 추구하는 현재의 트렌드는 뉴욕의 영향이 큰데, 가장 핫한 패션을 제일 빨리 포착하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 자라와 H&M이 그 글로벌한 유통망을 이용해 뉴욕 스타일을 전세계에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뉴트럴 컬러에 대한 애정은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끝내기 전에 초반에 언급했던 오방색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오방색이 지금 한국의 옷 색깔과 이토록 동 떨어져 있는 이유는 총천연색의 처마와 색동 저고리가 일상의 오브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처마는 궁의 지붕에만 있었고 색동 저고리는 축일이나 명절에 특별히 아이들에게 입혔던 옷이었다. 향후 누군가 한국의 소울 컬러를 묻거든, 적어도 패션에 있어서 비빔밥의 오방색으로 시작하는 건 첫 단추부터 삐끗하는 격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