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F/W 서울 컬렉션] '패션테이크오프' 등 유망주 집중 육성, 비즈니스 바잉쇼로 재편

이상봉 Lie sang bong paris
3월 28일 2011 F/W 서울패션위크가 개막했다. 지난 시즌 10주년을 맞으며 안팎으로 큰 변화를 겪은 서울패션위크는 ‘비즈니스 중심의 패션 행사를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의지에 맞춰 구성과 스케줄, 참여 디자이너를 대폭 개편했다.

신인 중심으로 갑시다!

이번 행사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물갈이’다. 오랫동안 서울패션위크에 참여했던 중견급 디자이너들이 대폭 빠져나가고 뉴 페이스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주최측은 본 쇼는 이전처럼 서울무역전시장(SETEC, 이하 세텍)에서 진행하고, 근처에 신진 디자이너들을 위한 장소(대치동 크링)를 아예 따로 마련해 일반인 관람객 출입을 제한한 비즈니스 중심의 전문 바잉쇼로 구성했다.

경력 1~5년의 신진 디자이너들을 위한 제너레이션 넥스트(Generation next, 이하 GN) 외에도, GN에 3회 이상 참가한 디자이너들 중 해외 시장에 경쟁력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최지형, 홍혜진, 김선호, 스티브제이&요니피 등을 ‘패션 테이크 오프’라는 그룹으로 묶어 바이어와 프레스, 패션 전문가들에게 집중 공개했다. 이는 런던패션위크의 ‘패션 포워드’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떠오르는 유망주들을 글로벌 디자이너로 키우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최지형 Johnnyhatesjazz
쇼장 이원화는 결과적으로 슈퍼 루키들의 잔치가 되었다. 인지도 있는 기성 디자이너들에 비해 늘 덜 주목받았던 신진 디자이너들은 유망주들과 하나로 묶여 프레스와 바이어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물론 상대적으로 기성 디자이너들의 쇼가 썰렁해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버스 한 정거장 거리로 떨어져 있는 세텍과 크링을 오가기에 30분이라는 텀은 너무 짧았던 것. 크링에서의 쇼가 15분만 지연돼도 세텍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대다수의 바이어와 프레스들은 신진 디자이너들을 볼 수 있는 크링을 택했다.

서울산업통산진흥원의 박연주 팀장은 “두 개의 장소가 가까이 있어서 충분히 모든 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착오가 있었다. 사실 전세계 어느 컬렉션도 모든 쇼를 넉넉하게 볼 수 있는 스케줄을 구성하는 곳은 없다.

파리 역시 일주일 동안 100여 개의 쇼가 진행되며 바이어들은 관심 있는 쇼를 선택한다. 다음 시즌에는 해외 비즈니스를 하지 않는 디자이너들을 위한 날을 따로 만드는 식으로, 바이어들의 동선을 최대한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옷에 사람이 빠졌다?

이승희 LEYⅡ(좌), 이주영 Resurrection(우)
“참가한 해외 바이어들 사이에서는 행사가 끝난 후에도 한국의 패션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뉴욕에서 국내 디자이너들의 비즈니스를 컨설팅하는 기한 대표의 말이다. 그는 이 말이 한국의 전통 문화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동양적 모티프가 서구 사람들에게 새로움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팔 수 있는 옷이다. 밀라노의 장인정신, 파리의 드레시함, 뉴욕의 캐주얼함 말고 서울이 보여줄 수 있는 커머셜한 패션이 있어야 한다. 디지털을 도입한 패션이라든가, 기능성을 강조한 패션, 무엇이든 좋다.”

전문가들이 꼽는 컬렉션의 전반적인 문제점은 ‘사람의 실종’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이디어 투성이다. 그러나 정작 옷을 입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없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보이도록 옷이 사람에게 흡수돼야 하는데 도리어 옷이 사람을 가려버린다. 그 옷을 입고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만든 것인지 궁금하다.”

홍승완 ROLIAT(좌), 예란지 THE CENTAUR(우)
주최측이 내내 강조한 상업성은 정작 옷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셈이다. 스튜디오 케이의 홍혜진, 쟈니헤잇재즈의 최지형, 체인지바이이현찬의 이현찬, 그란지야드의 이지은, 언바운디드 오의 구원정 등이 신선함과 정체성을 비교적 잘 보여준 디자이너로 거론됐다. 이탈리아에서 온 바이어는 “옷은 다른 산업과 달리 문화가 배경이 되어야 한다. IT는 얼른 보고 따라 하면 되지만 옷은 생활이 기반”이라고 지적했다.

매사 진지하고 무표정하며 성에 대해 터부시하는 한국인들의 성향이 옷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패션으로 서구를 장악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보다 섹시하고 재미있고 세련된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유머와 여유를 알고 글로벌한 가치관을 체득한 한국의 새로운 세대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바로 최근까지도 서울컬렉션에서 트렌드를 읽는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디자이너들은 자기의 내면 안으로 파고 들었고 행사장은 수주와 관계 없는 학생들로 붐볐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 바이어 중심의 상업쇼를 표방하며 변신을 꾀한 서울컬렉션은 이제 동시대 트렌드와 함께 호흡한다. 서울패션위크가 보내온 4가지 트렌드 시그널.

피할 수 없는 대세, 롱 스커트

한국에 마지막으로 롱 스커트가 등장한 것은 2000년 가을이었다.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송혜교가 입고 나온 롱 스커트는 청순가련 이미지의 집합체였고, 거리는 체크 무늬의 긴 모직 스커트로 넘실거렸다.

김선호 GROUNDWAVE
패션의 10년 주기를 재확인시키며 돌아온 롱 스커트는 그러나, 그때보다 훨씬 길고, 훨씬 풍성하며, 훨씬 자유분방하게 재등장했다. 포인트는 세가지다. 발목을 넘어 땅에 스칠 만큼 길 것, 펄럭이든지 딱 붙든지 둘 중 택할 것, 플랫 슈즈와 함께 신을 것.

이제 남자도 하이힐?

이번에 예정된 신발 패션쇼는 이보현 디자이너의 슈콤마보니 하나였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의도치 않은 슈즈 쇼가 탄생했으니 바로 관록의 디자이너 장광효의 컬렉션에 등장한 남성용 하이힐 때문이다.

런웨이에 선 남자 모델들은 모두 8~9cm 가량의 말뚝만한 굽이 달린 신발을 신고 등장해 관람객들을 놀라게 했다. 난생 처음 신는 하이힐 위에서 부들부들 떨며 워킹하는 모델들은 쏠쏠한 볼거리를 선사했지만 아쉬운 점은 핏 좋은 새하얀 모직 재킷과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검정색 하프 코트, 귀여운 후드 디테일에 미처 시선을 둘 새가 없었다는 것.

한국이 해석한 한국

장광효 CARUSO
전통이냐 현대냐. 한국 문화의 해외 수출을 앞두고 늘 반복되는 논쟁 속에서 패션은 아직도 고민 중이다. 전통 복식과 문화를 재해석한 패션이 서구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주장과 지금 한국의 현대 패션으로도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주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일단은 전자의 입장이 한 표를 얻었다.

해외 바이어들로부터 좋은 평을 얻은 디자이너 신재희와 김선호, 그리고 이상봉은 모두 한국 또는 동양의 문화를 모티프로 삼았다. 금욕을 화두로 꺼낸 신재희와 누빔 저고리를 연상시키는 김선호의 의상, 산수화를 아로새긴 이상봉의 옷은, 해외 진출을 노리는 디자이너들에게 한국을 해석하되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 제시등이 되어 주었다.

퍼의 실종?

혹독했던 지난 겨울 동안의 작업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컬렉션의 옷들은 유난히 얇았다. 두툼한 패딩은 2~3회 정도만 선보였고 특히 겨울이면 으레 줄 지어 등장했던 퍼 컬렉션이 실종됐다.

디자이너 박승건의 쇼에서 풍성하다 못해 흐드러진 빨간 모피 코트가 등장했지만 알고 보니 페이크(가짜) 퍼. 관람석에 일일이 'Fur is over'를 새긴 쿠션을 놓아 두고 피날레에 자신의 개 두 마리와 등장한 박승건 디자이너는 서울컬렉션에서 대대적으로 동물 보호를 외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박승건 push BOTTON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