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신토불이, 유기농 원칙 지키는 친환경 레스토랑

반미 샌드위치(위), 식스 팩 샐러드(아래)
토마토가 가장 맛있는 시기는 언제일까?

얼어붙은 대지가 표정을 누그러뜨리는 봄이 되면 노란색의 토마토 꽃이 핀다. 바람개비 모양의 꽃이 지면 6월부터 과실이 불그스름하게 익기 시작해 7월부터 9월까지는 토마토의 계절이다. 이 시기의 토마토는 빛깔이 붉고 선명하며 꼭지는 힘찬 초록색에 과육은 탱탱하면서 단단하다.

그러나 토마토가 언제 자신의 최선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다. 버거킹 햄버거와 편의점 샌드위치에는 늘 토마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3월 말, 헝그리 걸의 샌드위치에는 토마토가 없다. 제철이 아니라는 이유다.

국내산 재료로 만든 베트남 샌드위치

3달 전, 가로수길 인근에 문을 연 '헝그리 걸'은 4가지 원칙을 지키는 식당이다. 제철(Seasonal), 신토불이(Local), 유기농(Organic), 전체(whole). 앞 글자를 모두 땄더니 SLOW(슬로)가 되었다. 조미료, 화학첨가제, 유전자 변형식품은 이곳에서 설 자리가 없고, 지역에서 건강하게 키운 식재료와 최소한의 조리만이 존재한다. 지구와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고착된 식생활에 대한 전면전 선포다.

스키니 포크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 중 가장 많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유통이에요. 먼 곳에서 식재료를 날라오거나 반 조리된 식품을 배송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죠. 지역에서 난 식재료를 먹는 건 생각보다 훨씬 의미가 큰 행위예요."

헝그리 걸의 주인은 에코 라이프스타일리스트 권수현 씨다. 미술을 배우기 위해 떠난 미국 유학 생활 중 히피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각하는 식생활'의 중요성을 느끼고 제철, 지역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

"캐러멜 하나를 건네도 재료부터 점검하는 친구들이었어요. 동물 실험을 하지 않았다고 쓰여 있으면 그제야 안심하고 먹었죠. 그걸 보면서 먹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이 환경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지 알게 됐어요."

그는 귀국 후 지역 음식을 토대로 한 식당을 만들 것을 정부에 제안한 적이 있다. 각 지역마다 나는 가장 맛있는 식재료를 활용하는 식당을 열어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이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래서 홧김에 낸 것이 헝그리 걸이다. 프랑스, 쿠바, 베트남 등 다양한 국적의 음식을 만들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는 거의 다 국산이다.

어쩔 수 없이 수입 재료에 의존해야 할 경우 공정무역을 거친 친환경 재료를 엄선한다. 프랑스에서 먹던 양파 스프의 맛이 아니라고? 그건 중요하지 않다. 현지 맛을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몸에 좋고 환경에 좋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니까.

따라서 채소들의 전성기에 맞춰 메뉴도 철마다 바뀐다. 뿌리 야채를 넣어 만든 현미 밥 '헐리우드 루츠 볼'은 이 집의 인기 메뉴였으나 4월부터 사라진다.

뿌리 야채의 제철인 겨울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바게트 안에 돼지고기 햄과 맵게 만든 아도보 소스(필리핀 볶음 요리)를 넣은 샌드위치 ''에는 토마토 대신 숙주가 아삭거리는 채소 역할을 담당한다. 아무리 맛있는 토마토도 제철 숙주보다 나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모든 음식의 칼로리가 500kcal 이하

헝그리 걸은 지구를 위해 혓바닥의 즐거움은 포기해야 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다. 국산 마른 고추를 넣은 샌드위치는 한 입 먹으면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매콤한 것이 침샘을 단번에 자극한다.

식스 팩 샐러드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메뉴에는 부드럽고 고소한 몬테레이잭 치즈와 하루 동안 양념에 재워 퍽퍽함을 없앤 닭 가슴살이 들어 있다. 직접 만드는 아이스크림에는 설탕을 빼고 달콤한 아가베 시럽을 넣었으며, 공정무역 커피는 맛이 너무 묽어 제외하고 유기농 커피를 내고 있다. 권수현 씨는 최근 낸 책 <지속 가능하게 섹시하게>를 통해 '생각하는 식생활의 섹시함'에 대해 썼다.

"환경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이후 금방 우울해졌다. 어리석게도 이제 개량 한복에 풀뿌리만 뜯어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지속 가능한 삶은 알면 알수록 훨씬 더 쿨하고 트렌디한 생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좋은 점은 이 모든 메뉴의 칼로리가 500kcal 이하라는 것. 치즈가 죽죽 늘어지는 프렌치 어니언 스프는 280kcal, 야채 두부 덮밥은 300kcal, 식스 팩 샐러드는 280kcal, 헝그리 걸에서 가장 '뚱뚱한' 음식인 반미 샌드위치(베트남 샌드위치)의 칼로리도 480kcal다. 전문 셰프가 맛을 담당하고 여기에 영양학을 전공한 주인이 전체적인 영양소 밸런스와 칼로리를 계산해 완성한 결과다.

그러나 이제 막 '지속 가능'이라는 단어에 적응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서 헝그리 걸의 시도는 종종 좌절되기도 한다. 그 예로 해물 육수와 채소, 곤약으로 만든 '비움 스프'는 만성 피로와 부종,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해독 기능을 내세웠지만 인기가 없어 메뉴에서 빠지게 됐다.

고객들은 '먹어도 먹지 않은 것 같은' 느낌에 허전해했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자 하는 욕구, 입술에 기름이 번질거려야 제대로 한 끼를 해결했다는 생각, 다 먹고도 그릇에 음식이 남아야 포만감을 느끼는 습관들이 건강한 식탁을 가로막고 있다.

"가끔 식당을 가면 밑반찬을 다 먹지도 않은 상태에서 더 채워 달라고 하는 손님들을 보게 돼요. 그리고 잔뜩 남기고 일어나죠. 식당에서는 어차피 다 먹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에 반찬을 재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고요. 그 욕심이 결국 다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거예요. 적당히, 생각하면서 먹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어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