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의 옷] (10) 오락가락 오피스 룩개념 생소하고 가이드 라인도 모호… 프레피룩이 모범답안?

"엘리베이터가 열리는데 무릎 나온 청바지가 딱! 검정 프라다 짝퉁 스티커즈가 빡! 위를 보니 연핑크 카디건이 딱! 어깨에는 크로스 백이 빡!"

패션 테러리스트들을 주로 풍자하는 한 개그맨의 입을 빌자면, 한국 회사원의 패션은 대략 이렇게 요약된다. 여성 버전도 만들 수 있다.

"미니 스커트에 레깅스를 빡! 여름에는 발가락 보이는 쪼리를 딱! 추우면 어그 부츠를 빠박!"

2008년 삼성에서 임직원들에 '비즈니스 캐주얼' 선포령을 내리면서 한국의 오피스 룩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신세계 백화점도 올해 드레스 코드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바꿨다. 청바지를 허용하고(면바지도 물론) 셔츠는 칼라만 달려 있으면 가능, 신발도 스니커즈까지 가능, 대신 재킷은 입을 것.

편하게 입으라는 소리로 들리지만 원치 않는 자유였다. 전날 셔츠만 다려 놓고 아침에 검은색, 쥐색, 감색 수트 중 하나를 골라 입으면 되었던 남자들은 스타일링이라는 지옥에 빠졌다. 보브나 미샤에서 투피스 정장 몇 벌 사 놓으면 안심이었던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사토리얼리스트
대체 어떤 모양의 청바지를 어떤 색깔의 셔츠와 입어야 '비즈니스'스러우면서도 '캐주얼'할 수 있을까? 청바지 밑위 길이가 23cm면 비즈니스고 19cm면 캐주얼인가? 비즈니스 캐주얼이란 말은 20, 21, 22처럼 숫자로 똑 떨어지게 설명되는 단어인가?

넥타이만 풀면 캐주얼?

"바람직한 사무 복장에 대한 가이드 라인이 전혀 없어요."

패션 블로그 '스타일 피쉬' 운영자 중 한 명인 김현진 씨의 말이다. 김현진, 이수미, 이강주 3명이 공동 집필한 <비즈니스 우먼 스타일 북>에서 그들은 금융업계, 광고홍보 대행사 등에서 근무하는 직장 여성들의 오피스 룩을 분석했다.

"아주 크고 보수적인 곳에만 복장과 관련된 규제가 있고, 그것도 민소매나 플립플랍(쪼리)을 금지하는 정도에 그쳐요. 맨 발에 샌들을 신는다거나 스타킹 대신 레깅스를 신는 것이 격식을 덜 차린 복장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도 잘 형성돼 있지 않아요."

한때 스커트 수트가 아닌 팬츠 수트라는 이유만으로 윗 분들이 눈살을 찌푸리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 이야기다. 규칙과 규범으로 팽팽하게 조여져 고착화된 대한민국의 사무실 패션은 어느 날 갑자기 비즈니스 캐주얼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해방을 맞이했다. 얼떨떨하게 선 채 자유의 기쁨을 맛 보기도 전에 임무가 떨어졌다.

"매우 자유롭게 입되 사장님 심기는 건드리지 말 것."

<회사생활백서>를 쓴 칼럼니스트 아라 씨는 명령한 사람조차 그 기준을 모르는 한국의 비즈니스 캐주얼을 두고 "CEO가 오빠라고 불러, 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진짜 오빠라고 불렀다가는 무슨 사단이 날지 모른다. 비즈니스 룩에 캐주얼을 잘못 섞으면 자칫 'CEO 오빠' 같은 괴상한 장르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CEO'와 '오빠' 중 임원들은 당연히 'CEO'를 택했다. 그들은 '자유롭게' 라는 새로운 규정에 복종하기 위해 넥타이만 풀었다. 그 바람에 공연히 멀쩡한 수트 착장만 무너졌다. 눈치 없는 몇몇 사원들은 'CEO'란 말은 못 듣고 '오빠'에만 집중했다.

사장님 머리 속의 청바지가 엄연히 블랙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학교 때 입었던 블루진을 꺼냈다. 사장님이 구두처럼 가느다란 끈으로 묶는 스니커즈를 운동화라고 생각했을 때 또한 그들은 집에서 신던 진짜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왔다. 상대적으로 활용 가능한 아이템 수가 많은 여자의 경우 혼란은 더욱 심각했다.

지금처럼 피비 파일로가 불러온 미니멀리즘이 세계를 강타할 때에야 별 문제가 없지만 몇 년 전 패리스 힐튼이 유행시킨 패션 트레이닝 룩이 대세일 때는 엉덩이에 'PINK'가 새겨진 '츄리닝'을 입고 출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그 부츠도, 레깅스도, 발레리나 스커트도, 유행하는 것들은 모두 사무실 문턱을 기탄 없이 넘나 들었다.

오빠라 불리우는 사장님

"포멀과 캐주얼의 중간 단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요."

스타일 피쉬 이수미 씨의 말이다.

"완전히 포멀한 수트만 입다가 개념조차 생소한 비즈니스 캐주얼이 강요되면서 요즘엔 아예 캐주얼 쪽으로 치우쳐 버린 경향이 있어요."

포멀과 캐주얼 사이, 즉 비즈니스 상황에서도 허용되는 캐주얼이라는 게 정말 있긴 있냐고? 물론 있다. 신세계 백화점에서 편집숍 블루핏을 이끌었던 최재혁 바이어는 모든 비즈니스 캐주얼의 기본이 되는 착장에 대해 설명했다.

"짙은 감색의 블레이저, 여기에 파란색의 버튼다운 셔츠, 바지는 베이지색 카키 팬츠가 시작입니다. 여기에 면 소재 벨트나 갈색 스웨이드 구두, 약간 튀는 색깔의 양말 같은 것들도 격식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느낌을 주는, 훌륭한 비즈니스 캐주얼 아이템이죠."

가장 전형적이면서 흔한 비즈니스 캐주얼은 미국 명문사립고등학교 학생들의 교복에서 유래한 프레피 룩이다. 이는 여자도 마찬가지로 여자 교복이 아닌 남자 교복을 떠올리면 된다. 감색이나 짙은 회색 재킷에 옅은 푸른색의 셔츠 또는 블라우스, 베이지색 스커트는, 극도로 포멀한 착장이 요구되는 직업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나 만능인 오피스 룩이다.

간단해 보이는 비즈니스 캐주얼이 유독 우리에게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대체로 '기본'이 되는 옷을 싫어하는 한국인들의 습성 때문이다. 100만 원을 주고 마음대로 옷을 사라고 했을 때 질 좋은 흰색 셔츠나 길이가 엉덩이까지 오고 어깨에 아무 장난도 치지 않은 검은색 기본 재킷을 고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보다는 잡지에서 본 너무나 시크한 보이 프렌드 재킷이나 하나만 걸쳐도 그림이 되는 환상적인 워싱의 가죽 재킷을 고르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기본은 지루해"라고 외치는 그들의 옷장을 열어보면 모두 특별한 날에 입는 특별한 옷들뿐, 정작 매일 입을 수 있는 재킷이나 바지는 못 갖춘 경우가 허다하다.

"베이식은 트렌디의 출발점이에요. 기본 재킷과 셔츠, 바지만으로 세련되게 스타일링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고도의 감각이 필요한 일이에요. 그러니 멋 내기 어려운 데일리 아이템보다는 일단 특별한 디자인에 눈이 쏠리고 그것들을 서로 조화시키지 못해 끙끙거리게 되는 거죠."

좀 더 근본적인 데에도 원인이 있다. 아라 씨는 "직장 생활에서 옷으로 알려야 하는 것은, 나라는 사람이 아닌 나라는 직원"이라고 말한다. 대기업이든 직원 10명의 가족 같은 회사든, 오피스 룩의 핵심은 조직 친화성과 개인의 자아를 옷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조직 친화성이라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민족이니, 문제는 후자다. 실력으로 말해야지 옷으로 말하는 건 남세스럽고 구차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직장 내에서 옷으로 말할 수 있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대단히 구체적이고 다양하다.

칼 같은 펜슬 스커트로는 '이대로 일만 하다 죽겠어요'라는 비장함을, 꽃무늬 원피스로는 '나는 당신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회유의 말을, 휘황찬란한 양말로는 '언제든 이곳을 뛰쳐나와 내 사업을 하겠다'는 은근한 위협도 가능하다. 출근하기 전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뜯어보라. 당신의 옷은 회사와 CEO를 향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