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웨이브' 김선호 디자이너2011 F/W 서울 패션위크서 해외 바이어와 언론 집중관심 받아

사진=임재범 기자
1996년에 만들어진 영화 <데몰리션 맨>의 배경은 2032년이다. 냉동인간이 부활하고 사이버 섹스가 성행하며 개인의 식생활과 언어생활까지 국가가 통제하는 황당한 미래 사회. 그 생경함과 쇼킹함에 정점을 찍기 위해 감독이 선택한 미래 패션은 기모노였다.

동양의 문화는 서구의 상상력이 바닥을 보일 때마다 동원되는 단골 소재다. 오리엔탈에 대한 그들의 얕은 지식과 맹목적인 동경에 대해 혹자는 "만들어진 동양"이라며 대단히 불쾌해하기도 한다.

인도와 한국, 베트남을 하나로 묶는다거나 '한국 패션=한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보면 일부 합당한 불쾌함이기도 하지만, 펄펄 뛴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이럴 땐 오히려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동양의 신비함을 원하면 그걸 주면 된다. 물론 아주 세련되고 절묘한 방식이어야 한다.

지난 3월 열린 2011 F/W 서울패션위크에서 해외 바이어와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은 이는 이제 갓 서른이 된 젊은 디자이너 김선호였다. 그의 라벨 '그라운드 웨이브(ground wave)' 의 컬렉션은 승려들의 옷에서 영감을 받은 남성복들로 채워졌다.

"서양복의 모든 제작법을 따라 가되 한국적 요소를 넣고 싶었어요. 이런 건 서구의 디자이너들이 따라 할 수 없는 감성이니까요.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택한 거예요." 런웨이에 오른 재킷과 코트, 바지에 쓰인 원단은 승복처럼 보이는 천이 아니라 실제 승복지다.

일반에 수수한 회색 천으로만 알려져 있던 승복지는 디자이너에 의해 그 복잡다단한 세계를 열어 보이게 됐다. 이브닝 코트에 써도 될 만큼 눈부시게 화려한 흰색, 부드럽고 세련된 옅은 회색, 비 온 후 아스팔트 바닥처럼 단단하고 남자다운 짙은 회색, 숯처럼 새까만 검은 승복지까지. 여기에 티셔츠처럼 얇은 것, 외투처럼 두터운 것, 면으로 된 것, 울 혼방 된 것 등등 색깔과 소재, 두께, 조직에 있어서 그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저도 승복지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승복지를 쓰는 바람에 컬렉션은 온통 무채색이 됐지만 흑백의 미세한 농담 차이만으로도 충분히 넘치도록 많은 컬러가 나왔어요. 무채색의 무난함이 실제 구매를 일으키는 포인트가 될 거라는 계산도 있었죠."

속세의 욕망이 거세된 이 금욕적인 옷감이 산에서 내려와 도시로 스며들기까지는 몇 가지 조치가 필요했다. 김선호는 믹스매치와 레이어링을 사용했다. 승복지만으로 만들어진 옷도 있지만 대부분 잘 빠진 모직 재킷에 승복지로 더블 여밈을 덧댄다거나, 승복 재킷에 스포티한 배기 팬츠를 매치하는 식이었다. 재킷 아래로 펄럭거리는 얇은 승복지 셔츠는 지루한 수트 착장의 무게를 덜어주는 훌륭한 장치가 되었다.

삼천배가 연상되지 않도록 교묘하게 줄이고 섞었지만 한국인의 눈에는 여전히 승복처럼 보이는 그 옷들을, 세계적인 패션 저널리스트 다이앤 퍼넷의 블로그 필자 Philippe pourhashemi는 두고두고 칭찬했다.

"Layering effects kept the silhouettes fresh and exciting. Nothing felt contrived or overdone. The clothes had a softness and spiritual feel, too, which is exactly what's needed right now."

(레이어링 효과 덕에 신선하고 흥미로운 실루엣이 탄생했다. 과장되거나 억지스러운 부분은 전혀 없었다. 그의 옷에는 부드럽고 영적인 느낌, 바로 정확히 지금 필요로 되는 것들이 있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옷이니까"

최근 서울패션위크에서 4번째 국내 쇼를 마친 디자이너 김선호는 일찍이 해외 활동을 겸해 왔다. 2009년 6월과 2010년 1월, 파리의 패션 전시회 '랑데부 옴므'에 한국 디자이너로서는 유일하게 참가했고, 거기서 전시를 보러 온 바이어의 소개로 지난해 피렌체에서 열리는 대규모 남성복 박람회 '피티워모'에도 참여했다.

지난해까지는 동료 박정은 씨와 함께 듀오 디자이너로서 '그라운드 웨이브'를 이끌었지만 뜻이 달라 헤어지고 이번 시즌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컬렉션을 선보였다.

본격적으로 동양 냄새 물씬 풍기는 그의 옷들에 아시아권보다는 서구권에서 열렬한 반응을 보내 왔다. 미국과 러시아에서 그의 옷을 사갔고 홍콩의 바이어는 아예 쇼 피스를 그대로 바잉해갔다. 재킷 한 벌에 130만~150만 원으로, 다른 디자이너들에 비해 제법 높은 가격이지만 가격 저항도 거의 없었다.

2011 F/W 그라운드 웨이브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옷"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한 바이어는 그를 두고 "한국까지 와서 볼 가치가 있는 디자이너"라고 평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올해 1월 예정이었던 트라노이 전시회 참가가 무산됐지만 결과적으로 파리 전시회에 참여했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수주가 이루어졌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많은 러브콜을 받는 김선호 디자이너는 아이러니하게도 국내파다. 에스모드 서울에서 패션을 전공한 그는 남성복 브랜드 엘록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1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왔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성향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에게 어패럴 회사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라운드 웨이브는 따로 타깃으로 삼는 고객층이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걸 만들면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어요. 제가 추구하는 옷은 편한 옷, 그러면서도 돋보이는 옷이에요. 트렌드를 거부하거나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특별한 날 선택하는 옷을 만들고 싶어요."

전 세계 패션계가 거대 트렌드와 팔리는 옷에 집중하는 요즘, 그의 생각은 약간 위험하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옷에는 묘하게도 트렌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최근 패션계의 숙제이자 유행이 된 친환경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절이 산에 위치해 있다 보니 승복지 역시 산과 공존할 수 있는지 여부를 최고의 미덕으로 친다. 따라서 모든 승복지는 물 빨래가 가능하며 안에는 자연 건조될 수 있도록 목화솜을 넣어 누빈다.

게다가 숯을 이용해 천연 염색을 하니 무엇 하나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없다. 여기에 몸을 옥죄는 것을 싫어하는 디자이너의 성향이 더해지면서 '한국이 묻은 옷'이 탄생했다.

"같은 불교 문화권이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가 약간씩 달라요. 중국은 좀 더 화려하고 일본은 좀 더 차가운 느낌이죠. 한국의 승복에는 한국의 지형이나 토양, 그리고 그것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온 한국인들의 습성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