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the Kitchen] 21 김밥한때는 나들이 대표 메뉴, 패스트 푸드 되면서 비참한 신세로

"이게 무슨 민폐야!"

주말 아침부터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가 '남친님' 도시락을 싼다며 필자 집에 와 부엌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잠결에 문 열어 준 게 실수였다. 싱크대 바닥에는 물이 흥건하고, 온 집안에 참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김밥 재료가 부엌 바닥에 뒹군다. 남자친구는 저렇게 만든 김밥인 걸 알까. 친구가 두어 시간 끙끙대다 도시락을 싸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남은 김밥. 점심으로 먹어."

됐거든. 이렇게 난리 치고 김밥 다섯 줄 말다니. 그것도 재주다.

"이거 먹고 너랑 헤어지면, 그 놈 회사에 찾아가 드러누울 거"라며 친구를 내보냈다.

요즘 요리하는 남자가 대세라고 하지만, 남자들의 '여친님 접대 요리'는 평소에 자기들도 잘 안 먹는 파스타가 고작이다. 다시 말해 쉽고 빠르고 만들면 '모양'나는 요리들. 필자 경험을 포함해 주변에서 여자 친구에게 김밥 싸준 남자친구를 본 적은 없다.

거의 모든 여자들에게 스포츠카 탄 남자가 로망이듯, 거의 모든 남자들에게는 도시락 싸주는 여자가 로망인 듯싶다. 왜 남자들은 여자들의 김밥을 기다리는 걸까.

김빱 할 때 진짜 김밥이 된다

김밥. 말 그대로 김에 밥과 여러 재료를 넣고 싼 음식이다. '김밥천국'과 '김밥나라'가 지천에 널린 요즘에야 흔한 음식이 됐지만, 한때는 나들이 대표 메뉴로 자장면과 더불어 추억의 음식으로 꼽혔다.

맛도 맛이지만, 만드는 정성도 예사롭지 않아서 집에서 한번 김밥을 말면 저렇게 온 집안이 초토화된다. (네이버 백과사전은 김밥 조리 시간을 30분이라고 적어뒀지만, 필자 집에서 1시간 안에 김밥 만들어 나간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남자들이 기다리는 건 김밥 자체가 아니라 김밥에 쏟은 여자들의 정성일 게다. 시인 정일근은 김밥의 추억을 이렇게 썼다.

'표준어로 유순하게〔김:밥〕이라 말하는 것보다/ 경상도 된소리로〔김빱〕이라 말할 때/ 그 말이 내게 진짜 김밥이 된다/ 심심할 때 먹는 배부른 김밥이 아니라/ 소풍 갈 때 일 년에 한두 번 먹었던/ 늘 배고팠던 우리 어린 시절 그 김빱 (…) 소풍날 새벽 일찍 어머니가 싸주시던 김빱/ 내게 귀한 밥이어서 김밥이 아닌 김빱' (시 '김밥의 시니피앙')

애인이나 부인에게 제 어머니 같은 모성을 기대하는 그 심보가 징그러워서, 필자는 누구에게도 김밥을 싸 줄 수가 없었다. "그것 하나 못 해주냐?"는 친구에게는 이렇게 되물으면서.

"네 배가 우리 아빠 배 같아서 푸근하고 좋다면 징그럽지 않니?"

김밥처럼 특별한 날 먹었던 음식은 집단적 기억을 만들지만, 예외도 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이 어머니가 차려준 밥이라고 하지만, 필자에게 딱 두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김밥과 떡볶이였다.

식초, 조미료가 빠진 김밥 맛은 늘 싱거웠고 정성 들여 끓인 엄마표 떡볶이는 퍼져 버리기 일쑤였다. 소풍날 '파는 김밥을 사갔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디 감히 시장 김밥과 엄마표 김밥을 비교하느냐"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에 이 말을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배반한 필자처럼, 거의 모든 남자들의 로망을 배반하는 남자도 있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에서 주인공 현우는 윤희와 나들이를 준비하며 김밥을 만다.

'우리는 방바닥에 도마를 들여놓고 남은 밥으로 김밥을 말았지요. 당신은 갖가지를 넣고 둥글게 말아서 칼로 곱게 썬 김밥은 맛이 없다고 자기 식으로 싸겠다고 우겼어요. 김에다 밥을 길게 펴고 손으로 찢은 김치를 줄지어 늘어놓고 사이사이에 멸치볶음을 박아두었어요. 그러곤 그냥 기다랗게 둘둘 말았어요. 이걸 한 손아귀에 쥐고 위에서부터 한입씩 덥석 베어 물어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서글픈 천국의 현실이여

이런 김밥도 패스트푸드가 되면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다. 각종 엄마표, 친구표, 사모님표 김밥을 다 먹어봐도 필자 입에는 '김가네' 김밥이나 '김밥천국' 김밥이 제일 맛있는데, 나들이에 이런 김밥을 사가면 남자들 얼굴은 하나같이 김밥 먹다 돌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90년대 중반부터 생긴 김밥 체인점들은 파격적인 가격으로 김밥의 지위를 격하시켰는데, 사람들은 싼 값에 한 끼 식사를 해결하면서도 이런 음식들을 비하했다. 1000원짜리 김밥과 김밥 체인의 대명사 김밥천국은 비루한 생활, 남루한 장소의 대명사로 그려진다.

'김 밥 사세요 천원이에요 기임밥 사세요 천원이에요/ 자세히 보세요 햄이 없어요 자세히 보세요 싼게 비지떡/ 이 노래는 웃길라고 만든 것은 절대 아니야' (스푸키바나나, '김밥')

최근 개봉한 영화 <마이 블랙 미니 드레스>에서 유민(윤은혜)은 빼빼로데이를 맞아 동네 놀이터에서 캠퍼스커플인 복학생 선배(이천희)에게 '소박한' 선물을 받는다. 유민의 표정은 떨떠름해진다. 훤칠하고 착하지만, 이렇다 할 비전이 없는 남자친구를 못마땅해 하던 유민은 결국 해선 안 될 얘기를 내뱉고 만다.

"선배, 저번에 내 생일에는 김밥천국에 데려가더니만."

김밥천국은 이제 24시간 문을 열어놓는 음식점의 보통명사가 됐다. 하루 24시간 음식을 파는 체인점이라니. 한국 말고 다른 나라에도 이런 데가 있을까. 한 줄에 1500원짜리 김밥과 4000원짜리 김치찌개를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건 이곳 아줌마들의 저임금 노동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때문에 김밥을 사먹으면서도 늘 가슴 한 켠에 죄책감 같은 것이 남는다.

이것은 '메이드 인 차이나'나 '메이드 인 베트남' 티셔츠를 사 입을 때와 비슷한 죄책감이다. 값싸고 편리한 생활이 어느 한 쪽의 노동력 착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것들을 먹고 입을 때, 언제나 돈은 버는 사람보다 돈을 쓰는 사람들이 '서글프다'고 말하는 건 아이러니다.

'태오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스스럼없이 찾아 들어가는 곳은 한 줄이 천 원짜리 김밥을 주력으로 내세우는 분식 체인점과, 각종 패스트푸드점이었다. (…) 종일 격무에 시달리다 돌아온 저녁, 천 원짜리 김밥을 가운데 놓고 헤죽헤죽 웃는 어린 남자친구와 마주앉아 있자니 설명할 길 없는 서글픔이 퐁퐁 솟아올랐다.'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155~156)

주말 오전 쳐들어온 친구를 내쫓듯 보내고, 남은 김밥을 먹었다. 부엌 바닥에 뒹구는 김밥 재료가 눈에 들어온다. 아 젠장. 친구가 2시간 걸려 싼 김밥보다 김밥천국 아줌마가 2분만에 싼 1500원짜리 보통김밥이 더 맛있다.

이러니 사람들은 '비교우위의 재화'를 교환하며 사는 거라고, 우리는 죽을 때까지 돈 벌며 살자고, 저녁에 전화 온 친구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남친님' 반응을 물었다.

"아저씨, 뭐라디?"

"맛있다고 다 먹긴 했는데…. 다음에는 오빠가 샌드위치 싸오겠대."

'김밥천국 아줌마는 천국을 말고 있어요. 어두운 하늘 같은 김 한 장을 펼쳐 놓고 곤두서는 밥알을 꾹꾹 눌러요. 밥알 위에 당근 채찍 우엉 부엉 어영 부영 눕히더니 검은 멍석을 둘 둘 둘 말아요. (…) 빅사이즈 김밥 위로 어젯밤엔 참기름 바르듯 별이 쏟아졌어요./ 은총처럼 별들이' (심언주, '안녕, 김밥')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