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성·편안함 겸비한 작업복서 유쾌한 패션 대거 선보여

빳빳한 드레스 셔츠에 잘 빗어 넘긴 머리, 앉은 자리에 먼지 한 톨 남기지 않는 말끔한 남성은 왠지 모르게 얄밉다. 그렇잖아도 연애에 소홀한 초식남들로 인해 여자들의 할 일이 없어져 가는 지금, 이제 패션마저 '혼자서도 잘해요'란 말인가?

같은 맥락에서 먼지 풀풀 날리는 작업장 안, 무심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옷차림은 이성의 마음을 뒤흔든다. 저 빈틈, 참견이 필요할 것 같은 저 심미안, 옆에 서면 어지간히 튼튼한 여자도 한 떨기 꽃으로 만들어 줄 것 같은 저 남성성,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의 마음을 설득하는 영원한 가치, 기능성까지.

일할 때가 가장 섹시하다?

"아무래도 워크 웨어나 아웃도어가 대세가 되지 않을까요? 지금 일본은 워크 웨어 열풍이거든요."

지난 1~2년간 한국 남성들의 마음을 뒤흔든 클래식의 다음 주자를 묻는 질문에 므스크 샵 민수기 대표가 대답했다. 워크 웨어는 작업복에서 유래한 패션이다. 수 년간 세탁기에 돌려 빤 것 같은 닳아 해진 면, 몸을 구속하지 않는 넉넉한 핏, 먼지 쌓인 듯 채도가 낮은 색깔, 일의 능률을 높여주는 장갑, 주머니, 멜빵은 워크 웨어의 필수 요소들이다.

엠비오
지난 3월 일어난 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도쿄패션위크가 취소되면서 특히 팬들의 아쉬움을 산 브랜드가 있으니 바로 (white mountaineering)이다. 꼼데가르송에서 일하다가 2006년 자신의 레이블을 론칭한 디자이너 요스케 아이자와의 브랜드로, 그의 철학은 첫째 디자인, 둘째 실용성, 셋째가 테크놀로지다.

"우리가 입는 모든 옷의 일부분은 아웃도어여야 한다"고 외치는 디자이너가 일본 대신 뉴욕에서 선보인 2011 F/W 컬렉션은 일본식 워크 웨어의 진수를 보여준다. 담갈색 아노락 파카, 그 위에 겹쳐 입은 '주머니 주렁주렁' 나일론 조끼, 코듀로이 특유의 꼬깃한 주름이 잡힌 고동색 재킷과 팬츠, 거칠게 짠 니트 스웨터와 뻣뻣한 옥스퍼드 셔츠, 그리고 워커 부츠까지.

사실 워크 웨어는 사회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북유럽 패션이 원조지만 일본의 것이 훨씬 더 접근하기가 편하다. 서구에 비해 덜 화려한 얼굴과 덜 장대한 기골을 가진 동양인들은 이런 식의 드레스 다운이 유행할 때는 늘 조심해야 한다.

작업복 스타일이 유행이라고 해서 가감 없이 입었다가는 자칫 정말로 노동 일선에 투입될지도 모르기 대문이다. 투박하되 여전히 패션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긴장감은 워크 웨어의 핵심이다. 요스케 아이자와는 짤막하게 자른 귀여운 바지와 노르딕 풍 패턴을 요란하게 사용해 그것들을 성취했다.

다행히 이번 시즌 한국의 디자이너들도 참고할 만한 워크 웨어 스타일을 대거 선보였다. 재미 있는 것은 이제까지 클래식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홍승완, 한상혁, 김석원, 고태용 등이 앞장 서서 기능성을 가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디자이너 고태용의 라벨 ''의 이번 시즌 테마는 '이삿짐 센터'였다.

"바로 전 시즌에 대박 상품이 하나 나왔어요. 주문량이 밀리면서 덕분에 작업실이 거의 택배 사무실이 되다시피 했죠."

박스와 ??이(에어캡), 각종 포장재와 청테이프로 칭칭 감긴 작업실 한 가운데서 직원들과 함께 정신 없이 포장을 하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난리통의 흔적은 이번 시즌 런웨이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청테이프는 옆이 트인 조끼를 연결하는 장식으로, 에어캡은 유난히 볼록한 주머니로 형상화됐다.

모델들은 수트에 마스크를 쓰고 나왔고 가슴에 달린 포켓에는 행커치프 대신 벌건 목장갑을 꽂았다. 클래식 수트를 기본으로 파일럿 점퍼, 야구 모자, 맨투맨 티, 데님 셔츠가 마구 뒤섞인 가운데 급기야 마지막에는 박스를 머리에 인 모델이 등장했다.

클래식의 새로운 파트너, 워크 웨어

의 한상혁 디자이너가 클래식 수트에 기능성을 넣기 시작한 것은 조금 더 전의 일이다. 수트를 귀엽게 '트위스트'하는 것으로는 국내 최고 수준인 그는 '마운티니어링'이라는 주제로 등산복 디테일을 수트에 집어 넣은 적이 있다.

유럽풍 정장을 한 남자들은 자기 몸의 절반 만한 배낭을 지고 모직 담요를 둘둘 말아 배낭 밑에 달랑달랑 달고 나왔다. 아웃도어와 워크웨어가 사촌지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기능성과 노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산에서 실내 작업실로 장소만 이동했다.

수학 공식이 잔뜩 적힌 칠판을 배경으로 디자이너는 제도용 앞치마를 사용했다. 수트 위에 당당하게 장착된 대형 앞치마는 참 신선한 액세서리이자, 외부의 온도와 공격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아우터의 기능도 겸했다.

이 밖에도 팔 토시와 수트 재킷 위에 껴입은 패딩 점퍼, 아이폰은 물론이고 아이패드도 들어갈 것 같은 큰 주머니가 달린 아노락 점퍼 등은 클래식 수트 다음으로 남자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능히 짐작케 했다.

디자이너 홍승완의 은 정통 비스포크 수트 레이블답게 장작을 패고 트럭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박력은 없었지만, 리무진과 사무실만 오가는 포멀함에서도 멀찍이 벗어났다. 그는 진중한 클래식 애호가답게 파격적인 변형보다는 색채와 재질의 투박함으로 일명 '노동 간지'를 표현했다.

앤디앤뎁
전체적으로 검정과 회색, 베이지의 어두운 톤으로 진행된 이번 시즌에 모델들은 수트 위에 굵은 털실로 짠 니트 조끼나 체크 무늬 패딩 점퍼를 입고 뉴스보이 캡을 쓴 다음 털 장갑을 꼈다.

지난 겨울의 혹한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다가오는 겨울에 활용할 만한 스타일이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재킷 아래로 불량스레 삐져 나온 셔츠 자락은 흐트러진 신사에게서 풍겨 나오는 최소한의 박력처럼 보였다.

이들 외에도 포멀 코트에 가죽으로 아웃 포켓을 달아 강조한 최철용(CY_choi), 방탄 조끼 같은 패딩 베스트를 수트 위에 입힌 김석원(), 아예 아웃도어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해 등산용 양말을 무릎 위까지 끌어올린 최범석(제너럴 아이디어)까지. 워크 웨어와 아웃도어 룩은 작금의 클래식 트렌드를 바꿔 놓을 최대의 복병으로 자리매김 했다.

진짜 '노가다'를 뛸 것이 아니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작업복으로 입지 마세요, 제발."

비욘드 클로젯
디자이너 고태용은 워크 웨어를 시도하려는 이들에게 섞어 입을 것을 조언했다.

"목 늘어난 티셔츠에 꾸깃꾸깃한 워싱 면 재킷, 여기에 카고 팬츠, 낡아 빠진 컨버스 화까지 신고도 거지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은 정말 드물 거예요. 워크 웨어의 매력은 닳은 듯한 거친 면인데 이것과 상반되는 포멀하고 드레스 업된 클래식 아이템들과 매치해서 입으세요."

워크 웨어를 입고도 일에 찌들은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오피스 룩과 믹스 매치하는 것이다. 디자이너들이 보여준 것처럼 정통 포멀 수트 위에 양털 깃이 달린 아노락 파카를 걸친다든지, 수트 속에 거친 옥스퍼드 셔츠와 니트 스웨터가 보이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것저것 귀찮다면 드레스 업을 상징하는 넥타이를 워크 웨어에 포인트로 매치하는 것으로도 노동 일선에서 간단히 빠져나올 수 있다.


롤리엣
화이트 마운티니어링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