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곡물ㆍ과일ㆍ채소에 있는 천연 색소 노화방지ㆍ암 예방 탁월죽음, 소멸, 정신세계 의미하는 색… 라면, 음료, 밥솥까지 나와

검은 밥, 검은 물, 검은 찌개, 검은 나물. 이 시커먼 식탁은 성직자의 마지막 만찬인가, 죽음의 밥상인가.

검은색은 파란색과 함께 '밥 맛 없는 색깔'의 최고봉으로 오랫동안 군림해 왔다. 색채전문가 비렌에 따르면 음식 색에 따른 식욕은 빨간색에서부터 서서히 올라가 주황색에서 최고봉에 다다르며 노란색부터는 현저히 감퇴, 연두색에서는 거의 식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초록색에서 약간 상승했다가 파란색에 이르면 완벽하게 식욕을 잃고 자주색에서부터 다시 슬슬 올라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무채색은 종종 제외되는데 굳이 끼워 넣자면 흰색은 신선한 느낌을 주고 짠 맛을 연상시켜 식욕을 돋우는 쪽, 검은색은 쓴 맛과 부패를 떠올리게 해 식욕을 억제시키는 색에 속한다.

그러므로 몇 년 전부터 블랙 푸드의 부상은 특이한 현상이었다. 검은 콩, 검은 쌀, 검은 깨를 위시해 메밀, 가지, 우엉, 연근, 오디, 블루베리, 김, 다시마, 목이버섯, 캐비아, 오징어 먹물, 오골계 등등 새까만 식재료 군단이 자랑스레 밥상 위에 올랐다.

먹음직스럽지 못한 색깔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영양가다. 검은색의 원인인 천연 색소 안토시아닌이 노화 방지와 암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실 안토시아닌은 모든 블랙 푸드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성 음식, 그러니까 검은 곡물, 검은 과일, 일부 검은 채소에만 들어 있다.

함께 언급되는 흑마늘이나 해조류인 김과 다시마, 동물성 식품인 흑염소 등은 색깔만 검은 색이다. 그러나 안토시아닌 못지 않은 다른 영양 성분들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몸에 좋은 블랙 푸드'로 함께 묶어 부르기에는 손색이 없다.

그러나 맛 없어 보이는 블랙 푸드가 용서(?) 받은 이유는 사실 그 영양적 가치 때문만은 아니다. 블랙 푸드의 색이 진짜 새까맣지 않았기 때문이다. 흰쌀에 섞는 흑미는 밥을 하고 나면 촉촉한 자줏빛으로 백미를 물들이고, 검은 깨는 검은색이 아닌 짙은 갈색에 가까우며, 미역과 다시마는 어두운 녹색이다.

조리하는 과정에서 변화해 블랙 푸드로 분류되는 우엉, 연근, 메밀의 색은 검다고 하기도 민망한 회갈색이다. 안토시아닌 자체가 검은색이 아닌 가지나 포도의 검푸른 빛이니, 만약 블랙 푸드의 색이 검은색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제트 블랙(jet black: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다면 어땠을까? 그야말로 사형수의 밥상 같지 않았을까? 그러나 검다 못해 윤기 잘잘 흐르는 검은 고양이 같은 블랙이 식탁 위에 오르기 시작했으니 바로 음식 패키지에 사용되는 경우다.

검은 음식만 보면 군침이 줄줄?

검은색은 예로부터 폐쇄와 소멸의 색이었다. 흰색이 뭔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면 검정은 모든 여지를 불식시키고 종말을 고하는 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권위와 연결되기도 했다.

검은색 위에서는 모든 색깔이 무색해지듯이 그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어떤 식의 이의 제기도 불가능하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검은색 차를 타고 유리창까지 새까맣게 선팅해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아랫것'들의 저항을 미리 진압한다.

어떤 식품의 패키지가 검은색을 택하는 순간, 기대하는 바도 이와 비슷하다. 가장 고급스럽고 범접하기 어려우며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선언. 얼마 전 출시돼 라면 마니아들의 숱한 후기를 낳았던 은 그야말로 회사 측의 야심작이자 종결작이었다.

'첨단 설비인 고온 쿠커'로 우골을 고아낸 후 진공저온공법으로 진액을 추출해 만들었다는 우골 스프, 채소와 파뿐 아니라 마늘도 구경할 수 있었던 건더기 스프, 고급 소맥분으로 탄생시킨 찰진 면발. 회사 측은 "간편식이 아닌 보양식"이라고 당당히 선언하며 이례적으로 검은색 포장지를 선택하고 가격도 두 배 이상 올렸다.

그러나 사용자들의 후기는 냉정했다. "사골 맛이 좀 나는 정도", "야채 건더기가 크지만 이것 때문에 두 배 가격을 주고 사먹지는 않을 것."

신라면 블랙
회사 측의 '원기 회복'이나 '설렁탕 한 그릇의 맛과 영양'이라는 광고 문구에 다다르면 대거리는 더 거세진다. 한 사용자는 "정말 건강을 생각하고 원기를 회복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라면 말고 다른 음식을 먹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에 대한 혹평은 라면 자체의 맛이 떨어져서라기보다는 서민 음식인 라면이 섣불리 부르주아의 색을 택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의미한다. 그것은 까맣게 선팅한 경차나 검은색 영업용 트럭처럼 어색하다. 웰빙 시대라지만 아직도 대중이 라면에 요구하는 것은 간편함과 저렴함인 것이다.

빨강과 주황, 노랑을 총동원해 식욕을 당기기에 여념이 없는 식품 업계에서도 잠시 숨을 죽이는 때가 있는데 바로 명상적인 이미지가 필요할 때다. 검은색은 여기에 가장 적절하다. 유채색이 그리는 생기 넘치는 현실보다 변하지 않는 영원과 절대의 세계를 바라보는 이들은 늘 검은색으로 자신의 몸을 치장해 왔다.

수도자와 스님이 몸에 걸친 검은색 수사복과 먹물색 승려복은 육체의 감각에 휩쓸리지 않고 본질적인 것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는 증표와 다름 없다. 살아 있는 것들의 화려함과 생기를 부정하고 내면 세계로 물러나 고요히 침잠하는 것이다. 검은색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판화 작업에 '검은색'이라는 이름을 붙인 화가 르동은 흑색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검은색은 아무 것도 남용하지 않지. 눈을 즐겁게 하지도 않고 어떤 감각을 일깨우지도 않아. 검정은 팔레트나 프리즘 위의 가장 아름다운 색보다 더 적절한 정신의 대리인이야."

검은 콩을 우려낸 차 음료 블랙빈테라피와 까만콩차가 출시된 때는 한창 요가가 유행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건강을 추구하되 터질 듯한 근육 만들기가 아닌 정신과 신체의 밸런스를 맞추고 섭취 열량을 줄이는 것이 트렌드였다.

두 제품 모두 100% 국산 콩으로 우려낸 웰빙 차를 표방하며 체지방 연소, 기초 대사량 증가, 체질 개선 등 각종 테라피 효과를 강조한다. 둘 다 0 칼로리에 차분한 검은색 패키지로 옷을 입은 것은 물론이다.

젊음과 반항, 폭발하는 블랙

검은색이 늘 내면으로 파고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거친 공격성과 남성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폭주족들이 선택하는 가죽 점퍼와 오토바이의 색은 절대로 유채색일 수가 없다. 1954년 영화 <와일드 원>의 말론 브랜도는 검은색 가죽 재킷과 장갑, 오토바이로 무장하고 나와 터프 가이의 클리셰를 완성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힘은 위에서 말한 독재자나 자본가의 그것과 달리 억눌린 자들의 저항 정신의 발로다. 거칠고 불량스러운, 합법적으로 체계화된 제도권에 불응하고 위반하려는 세력은 늘 검은색을 택해 왔다. 해적선의 깃발도 아나키스트들의 깃발도 마찬가지다.

쿠쿠홈시스 블랙펄
10대 시절 유난히 검은색 옷을 선호하는 이유는, 색을 활용하는 연륜이 짧아서이기도 하지만 기성 세대에 대한 반발 심리도 한 몫을 한다.

코카콜라사는 최근 새까만 바탕에 타오르는 불꽃을 그려 넣은 음료수 (Burn intense)를 출시했다. 톡 쏘는 탄산과 상쾌한 맛이 더해진 음료로, 브라질의 천연 카페인 소스로 불리는 과라나에서 추출한 카페인과 타우린, 비타민 B3와 B6 등이 함유돼 있어 갈증 해소와 에너지 충전에 도움을 준다.

강렬한 검은색 패키지와 '타오르는 내면의 에너지'라는 뜻의 제품명은 회사 측이 타깃으로 삼고 있는 고객의 연령이나 마인드를 짐작하게 해준다.

죽음과 권위, 침잠을 상징하는 검은색이 20세기에 들어서 새롭게 얻게 된 이미지는 바로 세련됨이다. 현대 패션이 개막한 이래 여러 나라의 패션계에서 최고의 색으로 군림하는 블랙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숱한 분석을 시도했는데, 그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검은색이 산업사회를 위한 공산품의 색깔이라는 것이다.

20세기는 검은색이 여자의 세계로 편입된 기념비적인 시기이기도 한데 그 중심에는 샤넬이 있다. 이전에는 장례식장에서만 입었던 검은색을 이용해 샤넬은 리틀 블랙 드레스를 만들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색채도 없는 그 단순한 옷은, 입고 움직이기도 쉬울뿐더러 대량으로 찍어 내기도 쉬운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번 인텐스
샤넬은 자신의 옷을 카피하는 것에 대단히 관대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디자인 면이나 마인드 면에서 모두 산업사회에 최적화된 인물임을 증명했다. 검은색은 다른 모든 색 중에서도 특히 균일화가 쉬워 대량 생산에 적합한 컬러로,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최초의 대량 생산 자동차 'T형 포드' 역시 검은색을 채택했다.

이후로 검은색은 모더니즘의 상징이자 세련된 여자의 선택이 되었다. 그 여자의 취향은 옷장뿐 아니라 주방으로까지 이어진다. 지난 3월 쿠쿠 홈시스는 업계에서는 거의 드물게 검은색 밥솥을 출시했다. 블랙 펄이라는 이름의 이 압력 밥솥은 '백색 가전'이라는 주방의 절대 룰을 깨고 반들거리는 까만 색 몸체를 자랑한다.

뚜껑을 통째로 떼어내 세척할 수 있는 분리형 커버와 압력전용 내부 코팅, 내구성이 뛰어난 티탄 도금 등이 적용된 것 외에도 중국어 음성 안내 같은 시대를 반영한 기능도 있다.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비자 반응은 아직 불명확하나, 검은색 주방 가전이란 분명 주목할 만한 흥미로운 사례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하나씩 새로운 의미를 덧입고 또 버려온 검은색은, 이렇게 가장 미움받던 식욕의 세계로 진출했다.

참고서적: <검은 천사 하얀 악마>, 김융희, 시공사
<색채와 문화, 그리고 상상력>, 신항식, 프로네시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