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 짜는 남자, 허유베틀로 직접 원단 제작, 나만의 옷 만들어 울림 전하는 게 목표

삶은 동의와 거절의 연속이다. 같은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무리의 성향에 얼마나 찬성할지, 또는 얼마나 반대할지는 그 사람의 마지막 얼굴을 결정한다.

다들 결혼을 할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들 사무실에 방문하는 영업사원을 무시할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들 50대에 섹스를 중단할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화의 문제는 어린이의 탈을 벗는 그 순간부터 시작돼 일생을 따라 다닌다. 대중이 좋아할 음악과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수의 고민은 사실 인류의 보편적인 고민이다. 당신은 주류를 무시하면서도 흉측한 괴짜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지금 전세계 패션의 흐름은 패스트 패션이다. 빠르고 저렴하게 트렌디한 옷을 공급하는 것은 대중의 요구이자 기업의 지상 목표가 되었다. 디자이너들도 예외는 아니다.

흔히 예술가의 가면을 쓴 사업가라 불리는 패션 디자이너지만 이제는 예술가라는 가면도 우스워졌다. 그들은 대중의 취향을 거스르는 자아발현의 흔적을 잘라내고 가격을 낮춘 세컨드 레이블을 선보이며 소비자들과 눈높이를 나란히 하기에 여념이 없다.

모두가 대세에 끄덕이는 상황에서 '나답지 않다'는 이유로 고개를 젓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또 트렌디하지 못한 일인가. 그러나 그런 것은 예술적 측면에서는 필요한 일이며 경제적 측면에서는 희소가치가 있는 일이다.

일주일 동안 겨우 머플러 하나?

서울 계동에서 멀티숍 램을 운영하는 디자이너 허유 씨는 한달 전 베틀을 사들였다. 직접 원단을 짜기 위한 것이었다. 목재로 만들어진 큰 수직기에 면사나 모사를 걸어 직조를 한다. 하루에 3시간에서 4시간 정도를 들여 일주일을 꼬박 짜면 약 20cm 폭에 2m 정도 길이의 천이 얻어진다. 벌써 4개의 샘플 원단을 짜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원단의 품질이 불만족스러워서가 아니에요. '나'에 더 가까운 디자인을 하고 싶었던 거죠. 그것을 위해 패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단으로 돌아가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욕심이었어요."

허유 씨가 다른 디자이너들의 옷과 함께 자신의 브랜드 램을 전개한 것은 햇수로 꼭 10년째다. 그 동안 그의 행보는 일반 패션계의 주기와 완전히 다르게 돌아갔다. 보통 1~2월경 백화점 매장에 깔리는 봄 옷은 그 전 해의 가을에 기획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봄 옷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봄 여름 옷을 만들었다.

그것도 하나의 콘셉트 아래 기획된 한 무리의 컬렉션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불쑥불쑥 떠오르는 대로 하나씩 디자인했다. 청초한 여학생 같은 A 라인 스커트를 만들고 싶으면 그림을 그리고 원단과 부자재를 사서 가로수길에 있는 샘플실을 찾았다.

치마가 완성되면 바로 매장에 걸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또 블라우스 디자인이 하나 떠오르면 다시 원단 시장과 샘플실, 그리고 매장.

그가 시류를 놓친 것이 아니라 놓은 것이라는 증거는 작업실 위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초등학교와 주택가로 둘러 싸인 계동의 작업실은 3년 전에는 삼청동에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칼국수집과 한옥이 전부였던 삼청동에 터를 잡은 그는 2008년 즈음 그곳이 최고의 번화가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미련 없이 떠났다.

"작업 방식, 매장 위치, 대중과 만나는 방식, 모든 것이 비주류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저는 이게 편해요. 이게 저니까요. 자의식 과잉은 싫지만 스스로의 마니아적 성향을 인정할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직접 짠 원단으로 생애 첫 컬렉션

자신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은 공무원부터 순수예술가까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동일하다. 소설가는 인간 내면의 공포를 그린 자신의 책 표지에 귀여운 일러스트를 박아 놓은 편집자를 증오하고, 자연식을 만드는 요리사는 시장에 가득한 하우스 재배 농산물에 절망한다.

이에 그림을 배우는 소설가와 땅을 일구는 요리사, 그리고 원단을 짜는 디자이너는 한 가지다. 독하게 자신을 지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결과는 늘 성공적이지는 않다. 하루 종일 땡볕 아래서 뻘뻘 땀을 흘린 뒤에도 고작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손가락 만한 고구마 몇 개를 얻는 초보 농사꾼과 다르지 않다.

"시행착오가 많아요. 실 뭉치였을 때는 너무 예뻤는데 막상 직기에 걸어 짜보니 너무 뻑뻑하다든지, 아니면 너무 부드러워서 온통 엉킨다든지. 색깔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실들도 원단으로 섞어 보면 전혀 안 어울릴 때도 있어요. 물결치는 것처럼 얇은 실크를 짜는 건 아예 포기했어요. 하지만 미숙한 재료로나마 나만의 옷을 만들어서 그 울림을 전하는 것이 진짜 목표니까요."

직조를 하는 과정 역시 옷을 디자인하는 것에 못지 않은 직관의 연속이다.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에 대한 사전 계획 없이, 어떤 실들을 사용할 것인지만 대강 정해놓고 원단을 짜기 시작한다. 검은색 실로 천을 짜다가 회색으로 넘어가는 시점에는 아무런 계산도, 이유도 없다.

실의 색깔과 분량, 혼합은 모두 즉흥적으로 결정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이 홍수를 이루는 그 순간은 창작자가 자신과 대면하는 가장 짜릿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 결과물은 올해 안에 그가 선보일 생애 첫 컬렉션에 활용될 예정이다. 런웨이 쇼를 할지, 전시회를 할지, 영상을 만들어 보여줄지,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분명한 것은 약간 유니섹스 풍의 남성복이라는 것, 간절기에 적합한 시즌리스(season-less) 패션이라는 것, 그리고 직접 짠 원단이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패션계는 빠른 속도로 양극화되고 있어요.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쉽게 디자이너를 꿈꾸고 또 실제로 디자이너가 되죠. 생산자가 늘어나는 만큼 소비자도 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경쟁이 심해지면서 디자이너들은 그들에게 응당 기대되는 독창성을 포기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많이 판매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 속에서 더 내면적인 작업에 몰두하는 건 그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은 아니에요. 더 싼 생산처를 알아내고 단가를 낮추는 데에도 나름대로 많은 노력과 부지런함이 필요해요. 다만 저는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고 싶을 뿐이에요."

대세에 등을 돌리고 자아에 천착해온 그의 옷은, 놀랍게도 또는 다행스럽게도 대단히 컨템포러리하고 웨어러블하다. 애초에 패션은 '입을 만해야 한다'는 그의 가치관을 계속 고수해온 까닭이다.

후세에 남을만한 동시대성은, 어쩌면 세계 패션 흐름를 좌우하는 글로벌 기업이 아닌 개인의 내면을 규명하고 고집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