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의 외교 가정교사에서 힘의 미국 이끌 선봉장으로

美 외교 새 사령탑 콘돌리자 라이스
부시의 외교 가정교사에서 힘의 미국 이끌 선봉장으로

50세의 미혼에 개신교 신자인 콘돌리사 라이스가 신임 미국 국무장관에 지명됐다. 여성으로선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매들린 올브라이트에 이어, 흑인으로는 전임 콜린 파월에 이은 두 번째다. 라이스는 의회 인사 청문회를 거치는 한달 가량이 지나면 파월에 이어 미 외교를 책임지게 된다.

라이스는 1954년 남부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목사 아버지와 음악 교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라이스는 어릴 적 극심한 인종 차별을 경험한다. 9살 때 백인 극단주의 집단인 KKK단에 의해 친구가 사망했다.

하지만 라이스는 ‘출세’하고도 흑인 권리 향상에 무심하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다른 것에서 관심을 찾았다. 그의 부모는 교육만이 차별을 없앨 수 있다며 백인보다 두 배 열심히 공부할 것을 주문하고, 그에 맞는 교육 환경을 제공했다. 이런 덕분에 라이스는 러시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고, 한때는 피겨 스케이트 선수도 지냈다.

2002년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연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그의 어릴 적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4살 때부터 피아노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재능도 보였고, 그의 어머니는 이탈리아어인 콘돌체자(con dolcezza:부드럽게 연주하라)에서 딸의 이름을 빌려왔다.

흑인 최초로 버밍햄 음악 학교에 입학했지만, 흑인에게 피아니스트는 너무 먼 꿈이었다. 대학 2년 조지프 고벨 박사의 스탈린 강의를 듣고 방향을 바꿔 러시아 전문가가 되기로 한다.

당시 강의를 한 조지프는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의 아버지로 라이스의 평생 스승이 된다. 19세 덴버 대학 우등 졸업, 26세 소련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과 함께 스탠퍼드대 부교수 등의 배경에 조지프가 있었다.

소련 전문가로 부시家와 인연

라이스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카터 정부의 대응에 실망, 공화당원이 된다. 그리고 34세에 조지 H 부시 행정부 당시 소련 자문역을 맡아 정계에 입문, 소련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지난 2001년 6월 러시아를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가 푸틴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전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냉전에 마침표를 찍은 89년 몰타 미소 정상 회담에 미 대표단으로 나온 라이스를 회상하며 “내가 아는 소련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고 칭찬했다. 라이스로선 89~91년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무너져가던 소련과 동유럽권 담당 국장으로 일하던 때가 부시 가문과 인연을 맺은 시기였다.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면서 라이스는 스탠포드 대학으로 돌아가 학장, 최연소 부총장(38세)을 지낸 뒤, 다시 조지 W 부시의 2000년 대권 도전 대열에 합류한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95년 그가 텍사스 주지사였던 시절이다. 3년 뒤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은 라이스를 부시의 ‘외교 가정 교사’로 채용, 부시의 눈과 귀 역할을 맡겼다.

이후 외교 정책에 관해 부시 대통령은 라이스가 설명해 주기 전에는 말하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발전한다. 라이스는 역대 백악관 국가 안보 보좌관 가운데 유일하게 대통령과 함께 예배를 본 보좌관이다.

주말에는 부시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에서 운동하고 스포츠 중계 방송을 함께 즐긴다. 애칭 ‘콘디(Condi)도 부시 대통령이 붙여준 이름이고, 지난 14일 영국 대사관에서 열린 50회 생일에는 부시 대통령 부부가 깜짝 등장해 신뢰를 확인했다.

대통령과 각료의 관계를 넘어서는 인간적 유대를 맺고 있다는 것이 보다 어울리는 표현일 정도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라이스를 가리켜 “헬리 키신저 이후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보좌관이자, 로버트 케네디 이후 가장 가까운 각료”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라이스가 풀어 갈 과제는 만만치 않다는 게 미국 언론들의 분석이다. 5,000명의 직원과 세계 250곳에 사무소?있는 방대한 국무부는 일방주의 정책 기조에 대해 반발 기류가 가장 강한 행정부처로 꼽힌다. 우호적이지 않은 국무부 관리들을 어떻게 다독이면서 부시 정책기조를 관철시킬 지가 첫 시험대인 셈이다.

한국의 대북정책에 비판적 시각

그 동안 라이스는 강ㆍ온파간 균형자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목소리를 대변했다는 게 중론이다. 때문에 전임자 파월보다 보수적이고 미국 우월주의에 입각한 ‘힘의 외교 정책’을 펼 것이란 전망이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라이스 지명에 대한 직접 코멘트를 삼가고, 파월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은 미국 일방주의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국무장관 지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라이스(국무장관) 체제에서 세계는 미국의 힘과 품위, 당당함을 보게 될 것이다”고 소개했다.

이런 분위기로 볼 때 당장 현안인 중동 문제와 북한 핵 문제에서 보다 강경한 노선을 취할 것이란 분석이 많다. 라이스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ㆍ이라크 전쟁을 강하게 옹호하고, 북핵 문제에서 북한이 원하는 북 - 미 직접 대화에 반대해 왔다.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라이스는 비판적이란 평가다.

라이스는 지난 7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하고 “한국이 원하는 것은 ‘남북 통일’이 아니라 ‘정권 화합’인 것 같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발언에는 한국과 달리 북한 김정일 정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

사실 라이스는 북핵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와는 상반된 발언을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해 왔다. 2000년 1월에는 “만약 북한이 대량살상 무기를 확보한다면 멸망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경고했고, 2002년 2월에는 “한반도 평화는 한국의 의지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고 화살을 한국에 돌리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북한을 믿을 수 없다고 보는 라이스의 시각이 바뀐 증거는 아직 없는 듯 하다. 라이스는 지난 8월에 “북한 문제를 분쇄하기 위해 은밀한 조치를 포함한 많은 수단들을 검토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국인 가운데 이런 라이스를 잘 아는 지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라이스는 “한국 외교관 중에 한승주 주미 대사가 매우 감각이 있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선 2008년 대선후보로 거론

한편 라이스는 대중적인 인기도 높아 일부 네티즌들은 사이트까지 개설해, 라이스를 2008년 미 대선의 최초 여성 후보감으로 밀고 있다. 책 ‘콘돌리자 라이스’의 저자 안토리아 펠릭스는 “라이스는 최고를 지향했고, 그 정상에 올라 섰다”며 “세계는 9ㆍ11 이후 라이스가 보여준 신념과 안보 의지, 미래에 대한 믿음이 지속될 지를 지켜보고 있다”고 적었다.

국제부 이태규기자


입력시간 : 2004-11-23 16:35


국제부 이태규기자 tg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