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요, 뿌리깊은 무슬림 차별에 대한 분노…근본대책 시급

‘파리는 왜 불타는가.’

영화제목 같지만 지난달 말부터 실제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성난 젊은이들에 의해 밤마다 수백, 수천대의 차량과 건물이 불타고 경찰서와 관공서까지 공격당하는 일이 열흘이 넘도록 계속돼 왔다.

프랑스 정부는 1968년 5월의 학생시위 이후 최악의 폭동이라고 맹비난하지만, 불 붙은 민심을 어떻게 가라앉힐 지에 대해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

소요의 발단은 단순했다. 지난달 27일 저소득층이 주로 사는 파리 북동쪽 외곽 도시 ‘클리시 수 부아’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이슬람계 10대 청소년 두 명이 감전사했다.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만이 평소와 달랐을 뿐 무슬림에 대한 경찰의 집중적인 검문은 으레 있어 왔던 것이었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당국의 의심과 차별은 만성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두 젊은이의 죽음을 계기로 수 십년 동안 억눌려 왔던 이슬람계 젊은이의 분노와 좌절감이 일시에 폭발했다.

빈민층이 밀집해 있던 파리 외곽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방화 등 폭력사태는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파리 중심부는 물론 프랑스 전 지역으로 옮겨 붙었다.

이달 1일부터는 최루탄과 고무총을 쏘며 강경진압에 나선 경찰과 시위 젊은이들이 충돌해 경찰까지 수 십여명이 부상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수천명의 경찰인력과 무장헬기까지 동원했던 정부는 8일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지역 치안 책임자에게 야간 통행금지령을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경찰과 폭도들간의 충돌이 일부 지역에서는 ‘내전’이라고 할 만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다 못해 취해진 조치였다.

지난 10여일 동안 방화로 전소된 차량만도 5,000여대에 이르고, 프랑스 전역에서 학교 유치원 경찰서 등 100여곳이 습격을 받았다.

주류사회에서 배척받는 이민 2·3세

무엇이 무슬림 젊은이들을 폭도로 내몰았을까. 거리로 나선 젊은이들은 대부분 북아프리카 이슬람권이 혈통인 이민 2, 3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체념과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할아버지, 아버지와는 달랐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말을 쓰는 다 같은 프랑스 국민인데, 유독 자신들만 가난을 대물림하고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는 지를 납득하지 못했다.

백인 주류사회의 보이지 않는 배척 때문에 이들은 밀려나듯 외곽 슬럼가인 게토(Ghetto)에서 집단생활을 해야 했고, 번듯한 직장도 가질 수 없었다.

주류사회로 편입할 수 있는 길이 태생적으로 봉쇄된 것이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9.2%. 그러나 이민자들의 실업률은 14%다. 고학력 실업률을 보면 차이는 더욱 극명하다.

전체 대졸자 실업률은 5%인데 반해 북아프리카계 대졸 실업률은 무려 26.5%에 달한다. 대학 졸업장을 갖고도 4명 중 한 명 이상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놀고 있는 셈이다. 이력서에 무슬림식 이름을 써넣으면 아예 면접조차 보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다.

‘톨레랑스(관용)’의 나라, ‘자유 평등 박애’의 혁명정신을 내세우는 프랑스에 왜 이런 원시적인 차별이 깊게 뿌리 내린 것일까. 해답은 현실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념적, 추상적 포용에서 찾아야 한다.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은 ‘출생지에 관계없이 모든 프랑스 사람은 동등하며 차별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인권선언을 기본정신으로 한 ‘공화주의 통합모델’이 지금까지 내려온 프랑스의 통합 이념이었다.

이에 따라 종교와 인종이 결부되면 어떤 것도 차별적인 것으로 간주돼 용납되지 않았다. 심지어 아프리카계 흑인이나 무슬림의 실업률, 진학률에 대한 통계 조사도 금지됐다.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이념 때문에 소수자를 위한 대책은 공론화할 계기조차 얻지 못했다. 지난해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이 미국의 ‘어포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과 같이 학교와 직장에서 소수민족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소수자 우대 정책을 제안하자 우파와 좌파 모두로부터 ‘반 공화주의자’라고 집중 공격을 받은 것이 좋은 예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평등이라는 추상적 이념이 사회 곳곳에 실제 존재하는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할 손발을 묶어버린 셈이다.

현실과 유리된 이념논쟁이 환부를 더 깊고 넓게 만든 것이다. 우파 성향의 르 피가로는 “지금까지 관념주의냐 실용주의냐를 놓고 다퉈온 싸움에서 늘 관념주의가 이겼다”며 “그러나 현실적인 지원 없이 이념만 가지고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며 이 같은 허상의 폐부를 찔렀다.

공공연한 반 인권적 행위와 정치적 이용

인권이라는 고귀한 이념 뒤에서 반 인권이 활개를 치게 된 것은 프랑스의 안이한 이민정책이 불씨를 제공했다. 2차 세계대전 후 국가 재건을 위해 많은 일손이 필요했던 유럽 각국은 아프리카 동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이민자를 받아들이되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는 ‘느슨한 통합주의’를 표방했다.

차별하지 않으니 따로 도와줄 필요도 없다는, 바꿔 말하면 ‘너희들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이민자 정책을 일관한 것이다.

그러나 차별은 엄존했고, 공화주의 가치에만 함몰된 정부는 이런 현실을 외면했다. 엄밀히 말하면 외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정치인들은 백인 주류사회의 지지가 아쉬울 때마다 이민자들을 희생양으로 이용했다. 보수층, 기득권층의 결집을 이끌어내는데 민족주의 감정만큼 좋은 재료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는 최근 신자유주의, 극우주의 물결이 팽창하면서 더 심해졌다.

정치권은 경기 마저 불황인데 이민자들로 인해 일자리가 더 적어지고,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논리로 공공연히 적대감을 부추겼다.

이번 사태 초기 사르코지 장관이 폭력 주동자를 “인간 쓰레기” “건달”이라고 표현하며 “청소하겠다”는 인종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총재이기도 한 그는 2007년 대선 후보 중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달리는 유력한 대권 주자다. 첫번째 내무장관을 맡았던 2000~2004년 범죄와 전면전을 이끌어 치안을 급속히 안정시킨 공로로 지지도가 급상승한 그는 정제되지 않는 거친 발언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우파 정치인이다.

무슬림 젊은이들로부터 “죽여버리겠다”는 위협까지 받고 있지만, 이 점이 주류층으로부터는 인기를 오히려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르코지 장관의 강력한 대권 라이벌인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는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사태의 원인인 빈곤과 차별을 해소할 포괄적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중립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의 발언이 만에 하나 사르코지 장관의 강경 보수색을 겨냥한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프랑스는 200여년 전 피의 혁명을 다시 경험할 지도 모를 일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