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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필리핀·태국 - 분노한 민심, 정권이 흔들린다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 탁신 태국 총리, 부패 등으로 리더십 상실
경제정책 · 빈부격차 해소 실패, 커지는 '피플파워'로 벼랑에




▲ 탁신 태국 총리(좌)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동남아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과거 아시아 유력 지도자로까지 평가 받았던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과 탁신 친나왓 태국 총리가 거센 사퇴압력을 가하고 있는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과 독선으로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장 사퇴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부패와 실정으로 리더십을 상실하자 독선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모양새에서 민주주의는 그만큼 후퇴하게 됐다.

닮은꼴 정치 행로

아로요 대통령과 탁신 총리는 유난히 닮은꼴이 많은 지도자다.

이들은 2001년 권좌에 오른 뒤 동남아에서는 유례없이 재선에 성공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한 경력도 똑같다.

아로요 대통령은 미 워싱턴 조지타운대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같은 시기에 공부를 했고, 탁신 총리는 이스턴 켄터키대에서 유학을 했다. 경제전문가를 자처하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1961년부터 9대 대통령을 지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전 대통령의 딸이기도 한 아로요 대통령은 유학시절 경제학을 공부했고, 필리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탁신은 87년 친나왓 그룹을 설립한 뒤 91년 태국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억만 장자가 된 기업인 출신이다.

두 사람은 경제전문가인데다 개혁 마인드 등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집권했으며 연임 때도 많은 지지를 받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집권기간 동안 비판적 언론의 역할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는데도 비슷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가 나오면 해당 기자와 언론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주요 기업들과 결탁해 비판적인 신문과 방송에 대해 광고 중단 압력을 행사하는 모양도 비슷했다.

특히 아로요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뒤에도 언론사를 압수 수색하는 등 언론 탄압도 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아로요 대통령은 집권 후 쿠데타 설에 시달리는 등 리더십에 문제점을 드러낸 반면 탁신 총리는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는 등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 측면에선 대조를 보였으나 재집권 1년여 만에 완전히 리더십을 상실한 면에서는 다름이 없다.

부패와 도덕성 상실이 결정적 위기

두 지도자의 부정 부패 의혹과 도덕성 상실이 이번에 결정적 위기가 됐다.

아로요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남편 호셀 미겔 아로요와 하원의원이었던 아들 후안 미겔 아로요, 시동생이 불법 복권업자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정적인 이미지 실추를 가져오게 된다. 이에 아들은 하원의원직을 사퇴했으며 대주주 집안 출신으로 사업가인 남편은 해외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로요 대통령이 2004년 대선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에게 “100만표 차이를 유지하라”고 말해 개표에 관여한 사실이 도청테이프로 밝혀지면서 필리핀 일부 군부 세력과 야당, 민초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한 것이다.

탁신 총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탁신 일가족이 보유한 ‘친 코퍼레이션’주식 매각 과정에서 부정 의혹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탁신의 장남 판통태와 장녀 핀통타는 이 회사 주식 49.6%를 싱가포르 투자회사 ‘테마섹 홀딩스’에 매각 약 19억 달러의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이들은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세운 지주회사 ‘앰플 리치’를 통해 세금을 단 한 푼도 내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민의 분노를 사게 됐다.

탁신의 딸 핀통타는 태국 최고의 갑부로 꼽히고 있으며 2위의 포자만은 탁신의 처남이다. 탁신의 장남 판통태가 4위를 차지할 정도로 탁신의 일가는 태국 최고의 부를 거머쥐고 있다.

때문에 태국 국민들은 “서민들에겐 1달러 안 되는 국수 한 그릇에도 세금을 매기면서 총리 일가는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온갖 탈법을 동원했다”고 비난하며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특히 탁신 총리 본인도 지난해 최측근인 숙타나 전 보건장관이 수뢰혐의로 구속되면서 줄곧 비리의혹을 받아온 터였다.

경제실패와 빈부격차가 근본원인

이 같은 부정 부패와 도덕성 문제가 두 지도자에게 위기를 몰고 온 1차적인 이유이지만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정책 실패 및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빈부격차 문제라는 게 국제문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아로요 대통령은 부패와 방탕한 생활 때문에 쫓겨난 배우 출신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 하야후인 2001년 취임하면서 경제발전을 가장 큰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어 2004년 6월 재선된 뒤 취임하면서도 800만개 일자리 창출과 균형 예산 달성, 아시아 물류센터 구축 등 장밋빛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현재에도 8,600만 명의 필리핀 인구 가운데 35%는 하루에 단 1달러도 되지 못하는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다. 실업률은 11.5%에 달하고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4,250만 명이 빈곤아래서 생활하는 최악의 경제상황이다.



▲ 2월 27일 필리핀 대학생들이 마닐라에서
아로요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위·AP>
▲ 2월 28일 방콕시내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탁신 총리 퇴진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로이터>

때문에 필리핀에서는 한 국가가 아니라 부자와 빈자로 나뉘는 2개의 국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터져 나오고 있다. 정부의 세입 가운데 47%를 이자 갚는데 쓸 정도로 엄청난 국가 부채에도 시달리고 있다.

재정난이 심각하다 보니 국가의 미래가 걸려있는 교육이나 각종 인프라 투자는 형편없다. 30,40년 전 만해도 한국이 부러워하고 아시아에서 일본과 함께 선진국으로 부러움을 샀던 필리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탁신 총리도 20만바트(570만원)이하의 빚을 진 개인들에게 부채의 절반을 탕감해주는 빈곤층 구제와 앞으로 5년간 50조원 규모의 메가 프로젝트 건설 등 구호성 공약을 떠벌렸지만 민생은 늘 뒷걸음질해왔다.

물론 재임 기간 동안 연평균 6%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지난해 9년 만에 최대로 불어난 무역적자와, 4년 만에 최저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면서 경제정책 실패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국민총생산(GDP)의 2%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남부 지역의 경제는 여전히 관광객의 쌈짓돈에 의존하는 취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태국도 양극화 문제가 사회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위기해결 방식도 똑같아

아로요 대통령과 탁신 총리는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도 닮아 있다.

아로요 대통령은 퇴진 압력이 거세자 군부의 쿠데타 음모를 핑계 삼아 계엄령 전 단계인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야당 인사 등 정적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고 있다.

국가비상사태 선포가 위법이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100명 이상을 체포했으며 집회 및 시위를 금지시키고 있다. 1986년 1차 ‘피플파워’로 몰아낸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탁신 역시 퇴진 요구가 거세지자 3년 이상이나 남은 의회를 해산하고 4월2일 조기총선 실시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야당이 조기총선을 보이콧하기로 하고 정치 개혁을 위한 헌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당초엔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일 태세를 보였던 탁신 총리는 조기총선 강행이란 정면 승부수를 내거는 한편 자신의 지지세력을 동원한 친정부 시위까지 벌이고 있다.

세계의 무능한 지도자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아로요 대통령과 탁신 총리는 이 같은 강수로 당장 권좌에서는 물러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리핀과 태국 민초들의 분노와 실망은 실패한 두 지도자의 독선과 독단을 영원히 지켜보지는 않을 것 같다.




황양준 기자 naigero@hk.co.kr  


입력시간 : 2006-03-1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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